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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na Aug 19. 2022

봉지를 씌워주세요.

시련을 이겨나가는 힘-유머

뇌전증 환자인 나에게 가장 힘든 일은 발작이다. 물론 좋은 약 덕분에 전조증상 이후에 발작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간혹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거나 몸이 많이 피곤한 경우에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에는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이상한 기분이 들고 난 후, 대발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작게는 안면마비에서 크게는 과호흡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경직 증상이다. 사실 너무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나보다 심한 분들에 비하면 나는 아픈 축에도 들지 않을 것이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병을 앓은 지 한 삼 년이 되니 나름의 데이터가 생겨서 큰 발작은 피할 수 있는 요령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부부싸움을 피하는 것.


부부는 참으로 이상한 공동체이다. 너무도 다른 사람이 똑같은 공간에서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살아내야 하는 일종의 미션과도 같은 일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미션을 잘 수행했다고 해서 주어지는 보상은 없다. 그러니 굳이 열심히 미션을 수행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런 원리라면 애초부터 부부의 연을 맺지 말아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결혼이라는 의식과 함께 (그것도 신성한 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었고 우리의 미션도 시작되었다.

5개월의 짧은 연애의 끝으로 바로 결혼을 한터라 우리는 너무도 서로를 몰랐다. 그러나 그런 문제쯤이야 우리의 사랑으로 거뜬히 이겨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더랬다.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이기만 하던 신혼은 급행열차처럼 떠나버리고 뇌전증과 출산으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는 종종 부부싸움을 야기시켰다.

지금에 와서야 말하는 거지만 약 부작용으로 남편을 못살게 한적도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사실은 약을 핑계로

남편에게 히스테리를 푼 적도 많았다. 부부싸움의 승자는 언제나 나인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발작이 그 이유였다. 그 덕에 나는 화를 다스리는 법을 연마하게 되었고 3년이 지난 지금은 내 병을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부부싸움은 백해무익하니 싸우지 말길...


"아내가 발작이 일어나면 숨을 잘 못 쉬는데 괜찮을까요?"

"그건 과호흡 때문인데 그럴 땐 봉지를 씌우시면 도움이 됩니다."

"봉지요?"

남편과 나는 동시에 놀란 토끼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데 곧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간혹 영화에서 나오는 복면강도가 주인공을 납치할 때 주인공 머리에 뒤집어 씌우는 주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남편이 나에게 봉지를 뒤집어 씌우면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해보았다. 겁이 많은 남편이 내 머리에 봉지를 씌울 수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집에 있는 봉지라고는 노란색 종량제 봉지밖에 없는데 그것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웃길지... 내가 이런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겠지?

혹시 모를 부부싸움 후의 추한 모습을 방지하기 위해서 예쁜 봉지를 구해 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직업 중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하나는 코미디언이 아닐까 싶다. 웃을 일이라곤 거의 없는 각박한 세상살이에 웃음을 선물해 주는 그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수많은 고민과 걱정거리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맛있는 음식과 함께 재밌는 예능을 보고 있노라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복잡했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고민과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티브이를 켜거나 휴대폰을 보며 코미디 프로를 검색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우리는 이미 고민이나 걱정거리를 더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그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겪어왔다.

모든 일이 해결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고민이나 걱정이 아닌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까지 최선을 다하고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에서 유태인 차별로 인해서 수용소로 끌려간 주인공 귀도는 자신의 아들 조슈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본인의 죽음의 상황에서도 절망보다는 자신의 아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던 바람은 기적처럼 전해져 사랑하는 아들과 그의 아내가 살아남게 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결코 불행이 아닌 행복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우리들 모두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사람들이 되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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