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 보다 나는 생명이 있는 무언가를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누구보다 사교적이고 정이 많은 나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을 대할 때의 일이었다.
마흔까지 살면서 생명이 있는 그것들 (작은 화초부터 강아지까지)과 공생한다는 것은 애정보다는 책임감이 큰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책임감은 결국 부담감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였다.
포포는 하얀색 뽀글 털을 가진 푸들이었다. 어디서 길을 잃은 건지 헤매다가 동생이 있던 2층 PC방까지 찾아온 유기견. 인근 주변에 강아지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지만 주인은 찾을 수 없었고 그 이후로 포포는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집을 비우는 적은 거의 없지만 어쩌다가 모든 식구들이 외출을 하더라도 누구 한 명은 포포를 위해 빠른 귀가를 했다. 혼자 큰 집을 지키고 있을 포포를 위해서 좋아하는 간식인 육포는 필수였다. 그러나 지극한 사랑이 동정과 연민으로 바뀌게 된 어느 날이 다가오고 말았다.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소리가 요란하던 밤, 포포는 경기를 하며 온몸이 마비가 되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간 동물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를 받고 난 후에야 포포가 지금의 나와 같은 간질이라는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포포는 하루에 두 번 정확한 시간에 약을 먹어야 했다.
아침 약이야 그렇다 쳐도 약속이 빈번하게 잡히는 저녁 6시의 경우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동생은 애정의 마음으로 나는 책임감으로 그 시간을 지켜 약을 먹였다.
모든 일에 애정을 가지고 사랑의 힘으로 아픔과 시련을 헤쳐나가는 사람들은 극도의 슬픔의 순간도 비켜갈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책임감만 강한 나의 품에서 포포가 안락사를 하게 된 것을 보면 말이다. 책임감의 굴레가 벗겨진 그날이었지만 나는 오랫동안 가벼워지지 못했다. 그래서 두 번 다시는 생명을 책임지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흙속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는 작은 식물보다는 밑동이 잘린 꽃이 좋은 이유는 화병에 꽂혀 금세 말라버리는 꽃들에게 지극정성의 보살핌 따위의 책임감은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은 우리에게 물만 갈아줘도 되는 꽃이 아닌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하는 나무를 맡겨 버린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선물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다친 아빠를 책임져야 했고 피붙이라는 의무감으로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책임지는 그 긴 시간이 너무도 괴로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부담감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방감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가? 그 해답이 바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책임감이 완전한 사랑으로 맺어졌을 때 인생은 비로소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물한다. 아빠는 그렇게 나에게 의무라는 책임감이 아닌 사랑이라는 책임감을 가르쳐주고 나비가 되어 떠났다.
유골함의 따뜻한 온기가 내 마음속에서 식기도 전에 나는 작은 생명을 만났다. 결혼의 전제 조건이 무너짐과 동시에 이 작은 생명을 내가 과연 잘 보살필 수 있을지 불안하고 두려웠다. 무엇보다 나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나의 병이었다. 뇌전증이 태아에 끼치는 영향이 미비하다고 하지만 유전력이 0%가 아닌 이상 나에게는 미비한 퍼센트마저도 100%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기에게는 미안하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아기가 떠났으면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만약에 태어난 아기가 나와 같은 병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마흔 한살이라는 나이에 자연임신이 된 것도 기적적인 일이라며 다들 축하해 주었지만 나는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크게 뛰는 심장소리를 듣고서야 내가 비로소 엄마가 된다는 생각에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나는 또 다른 사랑의 책임감을 받아들였다.
"선생님 제가 임신을 했어요."
"어우, 축하합니다. 요즘 임신이 힘든데, 정말 좋은 일이군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기는 괜찮을까요? 매일 먹는 약이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최근에 발작을 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임신을 하고 난 후 단 한 번도 아프진 않았어요."
"보통 임신기간 동안은 발작을 하지 않아요. 위에서 주신 선물인 거죠."
의사 선생님은 눈을 들어 올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순간 나는 내 안에 있는 작은 생명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감동과 고마움이 느꼈다. 그리고 나는 아기를 품은 10개월 동안 단 한 번의 증상이 없이 평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타닥타닥'
모닥불에 놓인 장작들이 불에 타 들어간다. 먼저 들어간 나무장작들은 재가 되어가고 나중에 들어간 나무장작들은 뜨거운 열기를 내며 활활 타오른다. 불멍을 하며 그 나무들을 지켜보면 신기하게도 어느 나무장작 하나도 쉽사리 꺼지지는 않는다 것을 알게 된다. 재가 되어가는 나무들도 활활 타오르는 나무들 곁에서 작은 불씨를 연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이라도 모닥불을 벗어나 홀로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불씨를 잃어버린다. 이처럼 타오르는 생명이든 꺼져가는 생명이든 서로가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쉽사리 꺼져버리지는 경우는 드물다. 적어도 수한이 남아있는 경우에는 말이다.
최근에는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반려식물이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생명을 하나 거두어 기르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따져본다면 가성비가 0에 가까운 아니 마이너스에 가까운 이 고생스러운 일을 기꺼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나는 매일 아침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년인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자식들이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었을 나이에 편함을 뒤로하고 또 다른 생명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생명이 주는 가심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생명은 나의 생명을 단축시킬 것 같은 수고스러움을 주기도 하지만 역으로 나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귀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기사를 통하여 고독사로 인생을 마무리한 슬픈 소식을 접하곤 한다. 만약 그분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이어 줄 수 있는 또 다른 생명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람 人자는 두 명의 사람이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즉 사람은 혼자서 살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당신의 생명을 이어주는 비결은 바로 생명을 가까이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작은 식물이라도 키워보는 것은 어떨까? 이왕이면 내 밥상을 채워줄 수 있는 야채라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