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엄마가 되리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나의 불안과 걱정과는 달리 아기는 열 달이라는 시간 동안 별 탈 없이 잘 자라 주었다. 아기를 만나기 전날 마지막으로 병원 진료를 마치고 당분간 떠나 있어야 할 집에서 남편과 마지막 밤을 보냈다. 아기용품으로 채워진 집이 아직은 낯설기만 한데 내일이면 이제 둘이 아닌 세 식구가 된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수술을 위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지만 왠지 오늘 밤은 잠이 올 거 같지 않았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만큼이나 남편도 긴장이 되는 눈치였다.
병원을 도착하자마자 수술 준비가 시작되었다. 겁이 없는 나였지만 막상 수술대에 누워 있으니 덜컥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수술방의 찬 기운 때문인지 내가 겁을 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파르르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혈관주사로 퍼지기 시작하는 마취제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분주한 소리가 들리며 간호사들이 나를 회복실로 옮기는 듯했다. 그리고는 곧 남편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애기 봤어?"
"응 봤어. 건강하게 잘 태어났어. 2.9kg이래."
"진짜? 나도 보고 싶은데.."
"그래 나중에 보면 되니깐 일단 몸부터 추스르고..."
나는 다시금 스르르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나는 병실에 누워있었다. 무통주사 덕분인지 수술부위의 아픔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잠에서 깨기만을 기다린 듯이 남편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잘 잤어? "
"응, 잘 잤어. 그런데 오빠 얼굴이 왜 그렇게 안 좋아 보여? 많이 피곤해서 그렇지?"
"아니야, 음.. 그런데 오빠가 지금 나가봐야 할 것 같아."
"왜 무슨 일 있어?"
직감적으로 나는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글로리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무슨 일인데?"
"신생아실로 옮기고 글로리가 울음을 안 그쳐서... 끝내 호흡곤란이 와서 지금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데.."
"뭐?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일단은 지금 출발해야 하니깐 다녀올게. 걱정하지 말고.."
오빠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만을 남기고 다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뇌전증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없는 건데...'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죄책감이 들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가 아기가 잘못되면 나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제발 아무 일 없길'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병원에 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일단 글로리가 눈물은 멈췄는데 뇌의 이상이 있을 수도 있으니 검사를 해야 한데.."
"뇌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고?"
겁이 났다. 아기가 나와 같은 병이 걸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죽을 것만 같았다. 세상에 나온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내 아기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그 어떤 이유도 납득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자 억눌렀던 감정과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꼼짝없이 누워만 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소리 내어 꺼이꺼이 울고 나니 속은 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렸다.
'나는 이제 엄마야. 지금부터라도 강해져야 해. 아기를 위해서.'
너무도 슬프지만 다시는 울고 싶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올라오는 나쁜 생각들을 툭툭 털어버리며 나는 간절히 기도를 했다. 이제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3일 정도가 지나자 수술부위의 극심한 고통도 사라졌다. 나는 회복을 위해 시간이 나는 대로 움직였다. 남편은 매일 아기가 있는 병원으로 병문안을 갔고 그곳에서 사진을 찍어 보냈다. 여러 검사로 인해 지쳐 보이는 아기를 볼 때마다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잠깐이면 될 것 같았던 시간이 이제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기다리던 전화를 받았다.
"모든 검사는 정상으로 나왔습니다. 뇌에도 이상은 없고요. 내일 오전 중에 오셔서 퇴원 수속 밟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연거푸 감사를 전하며 전화를 끊었다. 일주일간의 애쓰며 힘들었던 마음이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다행스럽고 감사했다. 혹시나 임신 내내 먹었던 약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나의 병이 유전이 된 것은 아닐까? 내가 노산이기 때문에 아기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던 7일간의 이별이 전화위복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비록 여러 검사로 아기가 큰 고생을 했지만 그 덕분에 아기가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천만다행일 수밖에...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보통 남 탓으로 돌리거나 내 탓으로 자책을 하기도 한다.
A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그러니까 이 문제는 내 잘못이 아니야.
B: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야. 나는 용서받을 자격도 없어.
남 탓을 하는 A의 말속에도 내 탓을 하는 B의 말속에도 똑같이 보이는 말이 있다. 바로 -때문에라는 말이다.
-때문에라는 말로써 상황은 종료될 수는 있지만 마음 한편에 뭔지 모를 찝찝함이 남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들 마음속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때문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마다 거북함을 느끼게 한다. 즉 A는 남 탓을 함으로써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에 거북함을 느끼고 B는 내 탓을 함으로써 죄책감에 거북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때문에라는 말은 가장 이성적인 이유를 찾아주는 듯한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성을 잃게(?)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똑같은 일을 겪을 때 -덕분에라는 말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A: 누구 덕분에 일이 이 정도로 정리가 된 거야. 그러니까 이 문제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B: 내가 한 실수 덕분에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큰 실수를 막을 수 있었어. 그러니 자책하지 말아야겠어.
다소 억지스러운 대화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모든 일에서 부정보다는 긍정을 찾으라는 뜻이다. 어떠한 일도 단 한 사람의 탓으로 일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당신이 겪고 있는 그 일은 오로지 당신 때문도 아니고 남 때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겪고 있는 그 일은 당신 덕분에 그리고 남 덕분에 잘 해결이 될 것을 긍정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