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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na Jun 26. 2022

먼길처럼 느껴졌던 너의 죽음

비켜가고 싶은 정해진 미래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살아간다는 표현보다는 죽어간다는 표현이 왠지 더 익숙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실제는 죽어가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미래인데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비켜가고 싶은 정해진 미래인 죽음.

내가 죽음에 대해 초연해진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가까이하고 난 후부터였나 보다.


중학교 3학년.

나는 꽤나 쾌활하고 밝은 아이였다. 단짝 친구도 있었지만 반 아이 전체랑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캐릭터.

그 덕에 나는 50명이 넘는 반 아이들에게 생일 선물을 다 받았던 기억이 있다.

물론 장난반 진심반으로 생일 선물을 강요(?)해서 얻은 결과물이었지만 그것에 기분이 나빠하거나 싫어하는 내색을 표한 친구들이 한 명도 없었으니 교우관계만큼은 좋았던 게 분명하다.

그 해 내 생일은 벚꽃이 만발하는 4월로 봄소풍이 겹치는 날이었다. 매번 같은 장소로 소풍을 떠나지만 우리들에게 있어서 소풍은 가장 행복한 날 중에 하나였다. 지금에야 다양한 김밥집이 있어 엄마들의 수고를 덜어주지만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엄마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김밥을 싸서 도시락으로 챙겨 보내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우리 엄마도 시내에서 김밥 재료를 사서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에 각종 재료를 넣어 맛있게도 김밥을 싸 주셨다. 엄마가 김밥을 싸 줄 때면 동생과 함께 옆에 앉아서 툭툭 잘라주는 꼬다리를 집어 입 한가득 넣으면 어찌나 맛있었던지.. 아침부터 김밥으로 배를 빵빵하게 채우고 소풍을 가는데도 금세 다가오는 점심시간에 먹는 김밥이 또 왜 그리도 맛있었는지.. 분홍 소시지를 넣은 김밥, 어묵을 간간하게 볶아 넣은 김밥, 오이 대신 시금치를 넣는 김밥 등 다양한 김밥을 하나씩만 바꿔 먹어도 금세 배가 터질 듯이 불렀지만 집에 가면 또 그 김밥이 생각나는 것이다.

사실 나의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하나가 김밥인 이유이기도 했다.


"생일날 무슨 선물 받고 싶노? 내가 월요일에 너네 반으로 갈게."

"진짜? 그러면 예쁜 핀이나 하나 사주라. 머리 묶을 때 하고 다니게."

"핀? 그래 내가 예쁜 거 사 가지고 월요일에 반으로 갈게."

지혜는 1학년 때부터 나와 단짝 친구였다. 통통하고 성격 좋게 생긴 지혜는 웃음이 많은 아이였다.

말을 할 때마다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마다 벌어져서 난 이가 마치 악어 이빨처럼 보여서 나는 말하는 내내 이를 들여다보며 깔깔 웃곤 했다.

소풍이 끝나고 집에서 보내는 주말 내내 나는 지혜가 나에게 줄 머리핀이 궁금해서 주말이 금방 지나고 빨리 월요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던 월요일, 아침 자율학습이 끝나자마자  지혜와 같은 반이었던 민주가 나에게 급하게 달려왔다.

"혜진아, 니 그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

"지혜가 어젯밤에 교통사고가 났는데 지금 뇌사상태래."

"뇌사상태?"

'지혜는 지금 나한테 선물을 주러 올 건데, 오늘 우리 반으로 오기로 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얘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말이 뒤죽박죽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만 나왔다.

나는 쉬는 시간 내내 눈이 붓도록 울었다.

첫 번째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물상 선생님이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셨다.  물상 선생님은 지혜반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교탁에 서서 선생님은 무거운 입을 떼셨다.

"오늘 새벽 우리 반의 지혜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방금 지혜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평소 무뚝뚝하기로 유명했던 선생님의 눈에 눈물이 떨어졌고 지혜를 알던지 모르던지 간에 반 친구들은 다 같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친구 지혜를 잃었다.


친한 친구들과 지혜 어머니를 찾았다. 독실한 가톨릭 교인이셨던 분이셔서 그런지 오히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우리들이 마음의 큰 상처를 받을까 봐 따뜻하게 위로해주셨다.

사고가 난 그날 밤 지혜는 문구점에 살게 있다고 집을 나갔고 주차된 트럭 앞으로 길을 건너다가 달려오는 차에 부딪혀서 그 자리에서 세상을 마감했다.

아마도 깜빡 잊고 준비하지 못했던 내 머리핀을 사러 가려다가 사고가 난 건 아니었을까?

그 일이 있고 나는 한동안 열병이 나서 학교를 가지도 못했다. 나에게 있어 단짝 친구의 죽음이 몸이 아플 만큼 고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지금도 봄소풍이 생각나는 4월이 되면 지혜가 웃는 얼굴로 예쁜 머리핀을 쥐고 금세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데... 이제 나에게 환하게 웃어주던 악어 이빨을 가진 지혜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만 해당되는 일인 줄만 알았는데, 어린 내가 가기에는 너무나 먼길인 줄 알았는데... 그 길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에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면 그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주위를 둘러보면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고 살고 싶은데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은 불행일 것이고 살고 싶은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사는 것은 행복일 것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자. 영원히 산다는 것은 행복일지, 불행일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믿는다. 정말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일까? 나는 이런 의문으로 깊은 생각에 빠진 적이 있다.

그러다가 하나의 생각을 통해서 죽으면 새로운 세상, 흔히 말하는 하늘나라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믿게 된 것도 결국은 "사람"이라는 위대한 동물 때문이다.

그 위대한 동물은 사람이 나오는 TV를 만들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어내고 등등의 조물주가 인간을 만든 것처럼 상상력으로 대단한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존재들의 유통기한이 100년이라는 것이 너무나 짧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런 단순한 생각은 나의 믿음을 고착시켰다.

사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에도 이런 비밀이 숨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하면 우리는 "돌아가셨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돌아가셨다.

어쩌면 우리가 온 그곳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엉뚱한 나의 생각이 맞다면 두려움보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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