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오면 애들 보내라. 많이 보고 싶네."
"응 엄마,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어디가 아파야? 난 잘 지내고 있응께 너거들 걱정이나 해야."
외할머니랑 전화를 끊고 엄마는 혼잣말로 구시렁대었다.
"할마씨가 이상하네. 어디가 아프나?"
"왜? 엄마 외할매가 아프다나?"
"아니, 너 것들 보고 싶다고 놀러 오라네."
"여름방학 때마다 가는데 뭐. 좀만 있으면 가면 된다."
나와 외할매는 어떤 손자, 손녀보다 애틋하고 각별한 사이였다.
엄마는 19살 어린 나이에 8개월 만에 나를 낳고 장티푸스로 1년간 골방에서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불쌍한 딸과 불쌍한 손녀를 살리기 위해 고생도 많이 하셨다고 하였다. 엄마젖을 먹을 수 없는 나를 위해 쌀을 갈아 미음을 만들어 먹이고 머리카락 한올까지 다 빠져 버린 엄마를 위해서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사정을 해 1년간 왕진을 통해 본인의 딸도 살려 내셨다.
그렇게 살려낸 딸은 아빠를 따라가고 그렇게 살려낸 나는 엄마 없이 외할매와 5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
만약 외할매가 없었다면 엄마도 나도 벌써 하늘나라로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외할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았다. 방학이 되면 외할매집에 가서 조글조글한 손도 잡아보고 큰 찌찌도 만지작거리고 나는 외할매가 정말 좋았다.
나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방학만 되면 외할매집을 빠지지 않고 갔다. 그곳에서 방학 내내 외할매와 지내며 외할매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 딱히 갈 곳이라곤 시장 밖에 없었고 작은 방한칸에 방문 하나로 구분된 작은 부엌과 주인집 밖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아주 불편한 집이었지만 나는 외할매랑 지내는 게 참 좋았다.
몇 해전만 해도 정정하시던 외할매는 언젠가부터 자식들 몰래 약을 먹고 계셨다. 지금이라면 무슨 약을 먹는지 물어라도 봤을 텐데 어린 나는 그런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할머니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앉아 차디찬 물을 마시거나 냉장고를 열어 약을 챙겨 먹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은 다급하게 나를 깨우더니 막내 이모에게 전화를 걸라고 하셨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비몽사몽으로 막내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에 걸려 온 전화에 놀란 이모는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물었고 외할매는 큰일이 났다며 횡설수설 이야기를 하셨다. 지금은 정확한 이야기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당시에 외할매가 하는 행동에 살짝 겁이 났던 것도 같다. 전화기 사이로 칼칼한 막내 이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애 놀라게 새벽에 왜 그래 엄마? 지금은 밤이야 밤. 무슨 꿈을 꿨는가 보네."
막내 이모의 전화를 끊고서도 외할매는 연신 이상하다고 이야기를 하셨다. 그 모습에 나는 귀신이 온 것 같아서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 아침이 오길 바라며 잠이 들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할머니도 나처럼 머리가 아팠던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엄마의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외할매가 입원을 하셨다고 했다. 간경화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가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할매는 길어야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난 이른 새벽 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날이 온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대충 옷을 갈아입고 현관으로 달려 나가면 나에게 말했다.
"일단 학교를 가고 무슨 일이 있으면 아빠가 연락할 테니깐 고속버스 타고 부산으로 와라."
"왜? 외할매가 돌아가시는 거가?"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병원에 입원을 한 일주일 만에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죽음을 준비해 온 외할매를 다시 만났다.
선산에서 태울 옷가지를 챙기러 외할매집에 도착해 옷을 꺼내기 위해 서랍을 열자 정갈하게도 정리가 된 옷들이 보였다. 서랍 옆에 냉장고에는 그 흔한 김치 한조각도 계란 한알도 남아있지 않았고 부엌에 놓인 쌀통 안의 쌀은 마지막까지 털어먹고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그리고 평소에 신고 다니던 하얀색 고무신이 그렇게도 새 하얗게 씻겨 하얀 봉지에 넣어져 있었다.
아마도 본인은 자신의 죽음을 알았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아픔을 숨기면서 마지막을 준비했을 내 외할매.
관속에 놓인 외할매는 너무나 편안한 모습으로 잠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뭔지 모를 편안함과 따뜻함이 느껴졌다.
얼마 전 남편과 함께 120세까지 보장되는 연금보험을 가입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경제생활을 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한 일종의 노후준비였다. 십 년 전만 해도 만기가 80세였던 보험들도 많았는데 곧 100세 보험이 나오더니 이제는 120세까지 보장이 되는 보험이라니...
누구나 건강하게 장수하면 좋겠지만 사실 우리는 당장 내일 일을 알 수 없다. 기사에서 종종 보게 되는 각종 사고로 생명을 잃은 소식을 듣게 될 때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동시에 사고가 난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하늘나라로 떠난 그 사람은 그날이 자신의 마지막 날인지 알았을까?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라면 어떻게든 그 사고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찾았을 테니깐..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삶의 종착역에 다다르는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외할머니의 집을 정리하면서 나는 할머니가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고 있진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병이 악화되고 있었기에 삶의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겠지만 정확한 시간을 안 것처럼 모든 것을 마무리해 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 점을 배우고 싶었다.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이 나의 생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내 손으로 마지막을 준비하고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신이 나를 사랑하여 나에게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허락했으면 좋겠다. 너무 길게 준비를 해도 지겨울 것 같고 너무 짧게 준비를 하면 여유가 없을 것 같으니... 다음 생을 여행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 딱 일주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열심히 사는 것도 벅찬데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이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나 또한 우리 모두가 무병장수하길 바란다. 그러나 정말 만약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면 죽기에도 너무 바쁜 날이 되지 않겠는가? 이 경우에도 유비무환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