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밤’ 나누기

by 이경오

마당 댓돌 언저리에서 꼬박꼬박 졸던 누렁이 등허리로 가을 햇살이 슬그머니 내려앉을 무렵이면, 아이는 할머니와 고모의 손에 이끌려 종종 동네 뒷동산 탐사에 나서곤 했습니다. 이마 구석구석을 훑는 선들바람의 시원한 부채질만 해도 기분 좋고 감사한 일인데 가을 산이 선사하는 먹거리는 왜 그리 또 많았던지요. 아름드리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 가시투성이 밤송이에 화들짝 놀란 아이는 이내 어른들 흉내를 낸답시고 제 딴에는 야무지게 양발로 가시를 밟아 누르려다 호되게 혼쭐이 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할머니가 껍질을 벗겨 건네주신 햇밤을 한입 베어 물고서는 그 단맛에 취한 채 무슨 귀한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주머니 양쪽에 불룩하게 꿀밤을 주워 담느라 망아지처럼 온산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한 자루 흐뭇하게 들려 온 꿀밤은 얼마 후 할머니의 마법 같은 손길을 거치면서 쫀득하고도 찰랑거리는 도토리묵으로 변신하였지요. 한때 사방으로 뻗치는 가시의 위중(威重)한 엄호를 받던 알밤은 또 알밤대로 장작불 아래에서 맹렬한 인고(忍苦)의 시간을 참아내면서 더욱더 달콤하고도 노르스름한 군밤으로 거듭났고요. 그렇게 자연이 건네준 먹거리에 감사하며 가족 모두가 평상에 둘러앉아 정겨운 마음으로 두런두런하는 사이 가을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갔습니다.


자연인 관련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다 보니 그분들이 산에서 각종 먹거리를 채취하는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곤 했던 덕에 행여나 산행이라도 할 때면 낯익은 약초를 발견하곤 그 이름을 대며 동행한 이들에게 거들먹거리곤 합니다. 물론 TV 프로그램에서도 임산물을 채취할 때면 꼭 따라 나오는 경고문을 보았던 터라 함부로 손을 대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랬더니 산에서 자란 도토리·밤 등과 같은 열매를 함부로 채취했다가는 ‘산림자원법’에 따라 엄한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경고 기사에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익히 아는 바이긴 하지만 그 열매들이 동면을 준비하는 야생동물들의 중요한 겨울 양식이라는 이야기는 한 번 더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들고요. 그리고 보니 그 옛날 시골집 뒷동산에서도 할머니는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욕심을 부리던 아이에게 짐승 먹을 건 남겨 두어야 한다고 넌지시 말리곤 하셨습니다. 물론 벌금을 물리겠다며 윽박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만.



관련 기사 : [두유노우] 도토리·밤 땄을 뿐인데.. 벌금 5천만 원? / 파이낸셜 뉴스 (2020.11.12.) https://www.fnnews.com/news/202010221356316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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