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그대로

8. 괜찮다고 말해준 드라마 한 편

by 이헨

감정을 느끼지 않기로 했던 건

사실 그게 나를 지키는 가장 쉬운 방법 같아서였다.

일상 속엔 감정을 꺼내기 애매한 순간이 너무 많았고

괜히 나만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무던한 척, 괜찮은 척을 반복했다.


그러다 며칠 전

요즘 화제라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기 시작했다.

크게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아주 깊게 파고들어왔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삶,

어딘가 모르게 낯익었다.

말을 아끼는 어른들, 참는 게 당연했던 시절,

그리고 감정을 표현할 줄 몰랐던 사람들.


한 장면에서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자꾸 났다.

억지로 삼켜두었던 것들이

그 장면을 핑계삼아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울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생각보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누구한테 털어놓은 것도 아닌데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도 없었는데

그냥 스스로가 조금 덜 버거워졌다.


감정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좋은 핑계.

드라마를 보면서 울었다는 이유만으로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은 나를 조용히 돌볼 수 있었다.


이제는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을

조금씩 내려두기로 했다.

감정이 무너질까 봐, 관계가 흐트러질까 봐

억눌러두었던 마음을

조금은 흘려보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날 이후로 나는 드라마를 핑계 삼아 울고 웃고 있다.

감정을 내버려 둘 수 있는

드문 순간들을 조금씩 모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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