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그대로

11. 조용한 습관 하나로 버틴 하루

by 이헨

하루 종일 별일 없었다.

오전엔 평소처럼 출근하고, 익숙한 자리에 앉아 루틴처럼 업무를 처리했다.

중간에 회의도 있었지만 별다른 충돌 없이 무난하게 지나갔다.

점심은 구내시강에서 무표정하 얼굴로 비빔밥을 먹었고

오후엔 커피 한 잔 들고 자리에 돌아와 메일을 정리했다.


모든게 괜찬았는데

정작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닫는 순간부터 마음이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과 어울려 웃기도 했는데

현관에 벗어놓은 구겨진 운동화를 보자 갑자기 속이 시끄러워졌다.

가방을 내려놓고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어

그냥 전기포트부터 켰다.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서 있다가

수납장 안쪽에서 평소엔 잘 꺼내지 않던 흰색 찻잔을 꺼냈다.

루이보스 티백 하나를 조심스럽게 넣고 따뜻한 물을 붓는다.

투명한 김이 올라오며 은은한 향이 퍼졌다.

거실 바닥에 앉아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쥔다.

티비도 켜지 않고 핸드폰도 멀리 둔 채

그저 조용히 앉아 숨을 고른다.


생각이 많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말을 꺼낸 것도 아닌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이러지?"

나도 잘 몰랐다. 딱히 누가 속상하게 한 것도

오늘 무례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날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어딘가가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루틴을 만든 걸지도 모른다.

차를 우려내고, 찻잔을 감싸쥐고, 천천히 한 모금 마시는 일.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하는 감정의 틈을

내가 나를 다독이는 방식으로 메우는 시간.


마음이 부서지기 직전인 날은

소란스러운 위로보다 이런 조용한 반복이 더 도움이 된다.

그냥 "아, 내가 오늘 좀 그랬구나"하고 지나가게 해주는 힘.


이제는 "오늘 하루는 별일 없었어"라는 말 속에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을 조용히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 알게 됐다.

아무렇지 않은 날이 사실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날이기도 하다는 걸

이런 작은 루틴을 통해 조금씩 배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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