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날의 신기한 경험이다. 늦은 시간 손님이 들어섰고, 책을 꺼내기 시작했다. 몇 권이 아니라 상당한 분량의 책을 매대와 바닥에 두신다. 좀 이상해서 다가가 물었다. “이 책들을 사실 건가요?” “네.” 짧은 대답 후 다시 책을 꺼내신다. 상당한 양이다. “오~ 이렇게나 많이.” 신남과 함께 일이 많아졌다. 꺼낸 책을 가져오고, 포스기에 찍고, 높은 서가에서 꺼낸 책을 받고, 다시 정리하는 작업에 시간이 꽤 걸렸다. 손님은 모르셨겠으나 그날 서점 밖에는 구경꾼도 상당했었다. 지인이 술 한잔하자며 미리 와있었고, 소식을 듣고 온 서점 관계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책들을 팔아본 적도 사본 적도 없는’ 구경꾼들에게 의구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책들은 그날 팔렸다. 약속이 있어서 가신다며 금액을 보내달라고 했고, 나머지 책들은 다른 날 오시겠다고 했다. 나는 그날 두어 시간에 걸쳐 포스기에 수백 권의 책을 찍었다.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나뿐이지 않을까! 서점 아르바이트의 백미를 경험하게 해주신 손님에게 감사드린다. 복 지으셨으니, 새해에는 복 받으시라! 늘 적자에 시달리는 서점에도 분명 보탬이 됐을 것이다.
몇 해 전부터 TV 프로그램 자막이나 SNS 등에 ‘플렉스’란 단어가 많이 쓰였다. 처음엔 그 의미를 몰랐다. 사전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사전적 의미와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적 의미가 와닿지 않았다. 플렉스의 시대? 내 삶에는 없을 무엇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플렉스를 경험했다. 손님이 사간 책들은 도서관이 되었을 것이다. 며칠 뒤 다시 오셔서 나는 같은 일을 한 번 더 했다. 그때는 구경꾼 없이 오롯이 손님이 주인인 서점이었다. 서점에 이런 책이 있었나 싶은 책들도 숱했다. 책 등만 봐왔던 많은 책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고 만지는 이별의 시간이기도 했다. “잘 가, 그곳에선 사람들 손이, 눈이 많이 닿으면 좋겠다.” 플렉스된 그 많은 책들은 새집에서 자리를 잡았을까? 새집에서 오순도순 어울리고 있을까?
그날 술 먹자고 왔던 지인과는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건만 아직도 술자리를 갖지 못했다. 입이 댓발 나와서는 책만 팔고 술은 안 산다고 난리다. 서점이 안 된다며 와서 책 사라고 말했었다. 오는 날이 장날인지 그날 나는 양치기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해가 가기 전에 술을 사야겠다. 안 그러면 술친구들에서 잘릴지 모른다. 플렉스 하겠다!
내가 플렉스한 책들은 나의 어디로 갔을까. 한숨이 샌다. 아무 일 없이 한 해가 저무는 계절이다. 플렉스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해야 하는 그런 시간….
(뒷이야기) 그 손님은 그 후에도 우리 서점의 주요 고객이시다. 물론 처음처럼 책을 가져가지는 않으신다. 새로운 책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다만, 가끔 고민일 때가 있다. 포스기를 찍을 때 분명 가져가신 책인데 싶을 때다. 말씀을 드릴까 말까를 고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