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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Sep 16. 2023

《시인의 사랑》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중심으로 시를 통한 사랑의 영속가능성 고찰

“왜 제가 그대를 사랑하냐고요?”
왜냐고요—
바람이 풀잎에게
대답을—요구하지 않는 이유는 바람이 지나가면
풀잎은 흔들릴 수밖에 없어서예요.
“Why do I love” You, Sir?
Because—
The Wind does not require the Grass
To answer—Wherefore when He pass
She cannot keep Her place.

바람은 아는데—그런데
그대는 모르고—
우리도 몰라요—
우리에게 그런 지혜만 있어도
충분할 텐데요—
Because He knows—and
Do not You—
And We know not—
Enough for Us
The Wisdom it be so—

번개는 눈에게 왜 가까이 다가가면
눈을 감냐고—절대로—묻지 않아요—
말할 수 없기도 하지만—
점잖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말로 설명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아서예요—
The Lightning—never asked an Eye
Wherefore it shut—when He was by—
Because He knows it cannot speak—
And reasons not contained—
—Of Talk—
There be—preferred by Daintier Folk—

그대여—일출을 피할 수는 없어요—
일출이기 때문에—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그때—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The Sunrise—Sire—compelleth Me—
Because He’s Sunrise—and I see—
Therefore—Then—
I love Thee—
        —에밀리 디킨슨, 「480」 전문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아는 전부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열차의 짐은
철도가 견딜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That Love is all there is,
Is all we know of Love;
It is enough, the freight should be
Proportioned to the groove.
—에밀리 디킨슨, 「1765」 전문


에밀리 디킨슨이 말하듯, 사랑의 존재론적 근거는 대부분 희박하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의 존재론적 가치와 의미는 더욱 강화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처럼 사랑을 통한 연인의 존재론적 의미 강화는 대부분 상대방이 가진 형질과는 무관하게 작동하기 일쑤다.


그대를 감싸고 있는 아름다움은
내 마음의 활옷이기에,
그대 가슴에 내 마음 살고, 내 가슴속에 그대 마음 사나니.
For all that beauty that doth cover thee,
Is but the seemly raiment of my heart
Which in thy breast doth live, as thine in me: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 22」 중 일부


흔히 말해지는 ‘콩깍지’가 예증하듯, 사랑의 유지와 강화는 자폐적인 구조 안에서 작동한다. “그대라면 내 허리가 잘리어도 좋으리”라고 말하는 기형도의 사랑을 향한 처절한 고백(기형도, 「꽃」 중 일부)에서 볼 수 있듯, 사랑의 수행은 연인을 위해서라면 자기 파괴를 포함한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고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의 철저한 백치가 되는 것을 자처하는 것이다. 영생의 시인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위해 백치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소네트 35와 57), 심지어 사랑에 눈이 멀어 장님이 된다. 사랑을 통해 마음속으로 이식된 눈이 왜곡된 상을 비추기 때문(소네트 113과 137)이다.


사랑은 임에게 복종하는 충실한 바보라,
무엇을 하시든 나쁘게 생각지 않아라.
So true a fool is love, that in your will,
Though you do anything, he thinks no ill.
     —「소네트 57」 중 일부


나는 공범이 될 수밖에 없노라,
무정하게 내 것을 뻇은 고운 도둑의.
That I am accessory needs must be,
To that sweet thief which sourly robs from me
     —「소네트 35」 중 일부


너 눈먼 바보 사랑이여, 내 눈을 어떻게 했기에
내 눈은 보면서도 바로 보지 못하는고?
Thou blind fool, Love, what dost thou to mine eyes,
That they behold, and see not what they see?     —「소네트 137」 중 일부


조야한 것을 보거나 우아한 것을 보거나
가장 아름다운 자태 거나 미운 불구자 거나
산이나 바다, 낮이나 또는 밤,
까마귀나 또는 비둘기, 눈은 모든 것을 그대 모습으로 만든다.
그대만으로 채워지고 더 채울 수 없어
진실된 내 마음은 내 눈을 허위로 만들도다.
For if it see the rud’st or gentlest sight,
The most sweet favour or deformed’st creature,
The mountain or the sea, the day or night:
The crow, or dove, it shaps them to your feature.
Incapable of more, replete with you,
My most true mind thus maketh mine untrue.     —「소네트 113」 중 일부


사랑의 자폐적인 구조는 한편으로 위대하고 거룩한 드라마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허무맹랑하거나 혹은 불합리하고 끔찍한 스캔들을 정당화하는 가냘픈 명분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력의 여하에 상관없이 사랑은 필연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시간은 일단 포식처럼 파악된다. 존재가 그 먹이”라는 키냐르의 말처럼, 인간을 포함한 그 무엇도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수 없을뿐더러, 그 어떤 ‘존재’도 시간의 막강한 대사작용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초목의 절정을 이루는 여름이 겨울로 이행함에 따라 언제 그랬냐는 듯 형형색색의 초목은 하이얀 눈으로 지워지고, 가지와 대지는 앙상해진다. 셰익스피어는 시간의 폭력을 목도하고, 시간을 ‘폭군’이라 부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던,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시간’은,
바로 그 모습에 대하여 폭군의 역할을 하여,
뛰어난 미를 불미스럽게 만들도다.
부단히 흐르는 시간은 여름을
무서운 겨울로 이끌고 가서는 그를 소멸시키며,
수액은 서리를 맞고 생생한 잎새들은 사라져,
미는 눈에 덮여 모든 곳은 황량하여라.
Those hours, that with gentle work did frame
The lovely gaze where every eye doth dwell,
Will pay the tyrants to the very same
And that unfair which fairly doth excel;
For never-resting time leads summer on
To hideous winter, and confounds him there;
Sap checked with frost, and bareness every where: —「소네트 5」 중 일부


결국 사랑은 양적인 차이(변화까지 얼마나 소요되는지)와 각기 다른 절단면의 차이(이별의 다양한 양태들: 고별告別, 작별作別, 사별死別, 상별相別, 석별惜別 ···)가 있을지 몰라도, 상전이를 통한 질적 변화는 보편적이다. 심지어 상전이를 거친 사랑은 차갑게 식은 항성처럼 붕괴한다. 그칠 줄 모르는 열정과 지극한 정성으로 쌓아 올린 사랑의 신전은 불행히도 연인을 지나간 인연으로 바꿔 부르게 되는 그 순간, 지난한 폐허로 돌변하고(기형도), 망각으로 풍화되어 해변의 평면적인 모래사장이 된다(이장옥).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는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전문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훗날 너는 나를 기준으로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펴고. 또 아무런 깊이가 없는 해변을 거니는거야.
—이장옥, 「중독」 중 일부


김홍중은 쓴다. “과거의 연인은 폐허 같은 스산함을 품고 있다. 모든 이별은 작은 죽음들이다. 초상을 치르고 돌아와야 비로소 망자는 꿈에 나타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다. 그래서인지, 지금 한참 연애하는 사람을 꿈에서 보는 일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헤어진 연인은 가끔 꿈에 나타난다. 마치 헤어지지 않은 것처럼. 어떤 다른 세계에서 여전히 연인으로 살아갔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와 한번 섞였다가 다시 갈라져 나온 그런 인물처럼 조금은 낯선 모습으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렇게 꿈속에 가끔 그 사람은 나타나 머물다 사라진다.”(『은둔기계』)

따라서 사랑이 유일하게 염원하는 것은 영원, 즉 시대를 초월하는 자신의 영속일 터다. “저녁노을과 달빛을 사랑하듯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직 그 순간이 영속했으면 하는 소망뿐,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붙잡고 싶지는 않습니다.” 솔직 담백한 페소아의 사랑고백이다.


시인의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염원, 즉 사랑의 영생을 성취해 내는 데에 있다. 시인들은 단순히 사랑의 순간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사랑의 대상에 영생을 불어넣고 그 사랑의 유효기간을 무한히 연장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위대한 시인인 셰익스피어는 과감하고 무모하다고 할 만큼 언어를 연장으로 취해 시간에 대적하는 방식을 택한다. 시간을 향한 그의 장엄한 선전포고는 여러 소네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그대를 위하여 ‘시간’을 대적하여
그가 그대 뺏으려 할 때 시로써 새롭게 접목하노라.
and all in war with you Time for love of you,
As he takes from you, I engraft you new
     — 「소네트 15」 중 일부


세월은 청춘에게 주었던 꽃을 변모시키고,
그 아름다운 이마에 주름을 그어 놓고,
자연의 진리로 이룬 진품을 먹이로 하도다.
그의 낫 끝이 베려는 곳에 견디는 것 없어라.
그러나 내 시는 시간의 잔인을 물리치고,
그대를 찬양하려 길이 남으리라.
Time doth transfix the flourish set on youth
And delves the parallels in beauty’s brow,
Feeds on the rarities of nature’s truth,
And nothing stands but for his scythe to mow:
And yet to times in hope, my verse shall stand.
Praising thy worth, despite his cruel hand.
     —「소네트 60」 중 일부


아름다움의 탄생을 신화적인 메타포로 설명하는 그리스인들의 지혜에서 엿볼 수 있듯, 예술은 시간이 전쟁에서 얻어낸 노획물이다. 우라노스(하늘)는 가이아(대지)와의 끊임없는 교접을 통해 자신의 자식을 탄생시키고, 이들을 먹어치운다. 이로부터 가까스로 회피하고 성장한 크로노스(시간)가 자신의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인 우라노스와 대적한다. 마침내 크로노스가 승리하여 우라노스를 거세시킨 순간, 바다에 떨어진 그의 성기에서 거품이 융기하고, 이로부터 아프로디테(아름다움)가 탄생한다. 풀이하자면, 예술의 영원한 미적 가상은 세계의 맹목적이고 몰이해적인 생식과 포식, 즉 생과 죽음이 시간의 낫으로 베어지는 아주 짧은 ‘찰나’에 삶의 ‘지금-여기’ 위로 융기한다.


미적체험의 ‘찰나’는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쿤데라는 『불멸』에서 시의 소명에 대해 이렇게 쓴다. “시의 소명은 어떤 놀라운 관념으로 우리를 현혹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존재의 한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는 데 있다.”


시는 특유의 운율을 통해 언어의 리듬을 형성한다. 소네트는 14행으로 구성되며 전장과 후장으로 구분된다. 하나의 행은 약강오보격(iambic pentamete)인 열 개의 음절로 구성되어 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에 있어 4행으로 구성된 세 개의 quatrain이 전장을 이루고, 2행으로 구성된 하나의 couplet이 후장을 이루며, 그 운은 abab cdcd efef gg로 구성된다.


독일의 고전 문헌학자인 베르너 예거는 아르킬로코스의 단장을 분석하며 ‘리듬’을 뜻하는 희랍어 단어의 가장 오래된 흔적을 발견한다. “어떤 리듬”이 제 올가미에 인간을 몰아넣는지 유념하게.” 키냐르는 여기에 덧붙여 쓴다. “리듬은 그릇처럼 인간들을 “잡아 둔다.” 리듬은 결코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바다가 아니며, 되돌아왔다가 부서졌다가 물러났다가 쌓였다가 부풀어 오르는 파도의 고동치는 노래도 아니다. 리듬은 인간을 쥐고 북가죽처럼 고정한다. 희랍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쇠사슬의 “리듬”에 둘러싸인 채 바위에 영원히 결박되었노라 말한다.”  


마찬가지로 운율 역시 시간을 구속한다. “운율에는 어떤 강제력이 있다. 그것은 순종하게 하고, 동의하게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쾌락을 만들어낸다. 발걸음뿐만 아니라 영혼도 이 박자에 맞춰 움직인다. 사람들은 이렇게 추론했다. 아마 신들의 영혼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운율을 통해 신들에게 강제를 가하고 압력을 가하려 했다. 시를 마법의 밧줄처럼 신들에게 던졌던 것이다.” 니체의 말이다.


결국 시는 운율과 리듬을 통해 시간을 구속하고, 마모시킴으로써 사랑의 영속 가능성을 획득한다. 시인은 자신이 지은 노래를 통해 연인을 예찬하며, 그 예찬은 다른 이의 혀로 확산된다. 이는 생과 죽음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데, 육신의 스러짐과 무관하게 타인의 발화發話를 통해 시인의 사랑은 부활하기 때문이다.


내 그대를 한여름 날에 비겨 볼까?
그대는 더 아름답고 화창하여라.
거친 바람이 오월의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여름의 기한은 너무나 짧아라.
때로 태양은 너무 뜨겁게 쬐고,
그의 금빛 얼굴은 흐려지기도 하여라.
어떤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이 기울어지고
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로 고운 치장 뺏기도다.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그대가 지닌 미는 잃어지지 않으리라.
죽음도 뽐내진 못하리, 그대가 자기 그늘 속에 방황한다고
불멸의 시편 속에서 그대 시간에 동화되나니.
인간이 숨을 쉬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한
이 시는 살고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Sometime too hat the eye of heaven shines,
And often is his gold complexion dimm’d,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 declines,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trimm’d: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st
Nor shall death brag thou wander’st in his shade,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소네트 18」 전문


그러나 “부활은 삶으로의 복귀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의 품 안에서의 영광이다. 죽음을 거쳐 삶이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생이 죽음 속에서 혹은 죽음으로부터 단속 discontinu 되는 게 핵심인 것이다.”  따라서 시를 읽는 독자의 눈은 시인의 사랑이 부활했다는 증거가 되며, 시를 노래하는 독자의 혀는 시인의 사랑을 점화시키는 장작이 된다.


시간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확신한 셰익스피어의 노래한다. “나의 벗은 내 시 속에서 영원히 젊게 살리라.”(소네트 19중 일부)


어쩌면 내가 그대의 묘비를 쓰게끔 오래 살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가 흙 속에서 썩고 있을 때 그대 살아 있을 것이라.
어쨌든 그대의 기억은 죽음도 빼앗아 가지 못하리라.
내게 속하는 모든 것이 다 잊힌다 해도.
그대의 이름은 이 시에 의하여 영생하리라,
나는 한 번 죽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지마는
그리고 땅은 나에게 보통 무덤만을 주지만,
그대는 사람들의 눈 속에 누우리라.
그대의 비문은 나의 정다운 시라.
그것은 아직 창조되지 않은 눈들이 읽고,
이 세상에 태어날 혀들이 그대의 이야기를 하리라,
지금 숨을 쉬고 있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에.
     그대는 언제나 살리라—내 붓은 그런 힘이 있나니—
     숨결이 약동하는 곳, 사람의 입속에서.
Or I shall live your epitaph to make,
Or you survive when I in earth am rotten;
From hence your memory death cannot take,
Although in me each part will be forgotten.
Your name from hence immortal life shall have,
Though I, once gone, to all the world must die:
The earth can yield me but a common grave,
When you entombed in men’s eyes shall lie.
Your monument shall be my gentle verse,
Which eyes not yet created shall o’er-read;
And tongues to be, your being shall rehearse,
When all the breathers of this world are dead;
You still shall live, —such virtue hath my pen, —
Where breath most breathes, even in the mouths of men.
           —「소네트 81」 전문


영국은 이미 해가 지는 나라가 된 지 오래지만, 영국인 셰익스피어의 사랑만은 저물지 않을 터다. 왜냐하면 시인의 사랑이 해처럼 떠오르는 곳은 대양도, 대륙도 아니라 대화이기에. 시인을 아는 이가 있는 곳에 그는 현존하며, 시가 노래되는 곳에 시인의 사랑이 현전 한다.


시를 통한 언어의 극점에서 사랑의 영원한 백야가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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