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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Sep 28. 2023

인간과 고통의 관계 — I

니체의 ‘디오니소스’는 누구인가?

“네가 고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겠다!”라는 에른스트 융어의 말처럼 인간의 자아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원리는 ‘고통관리’이지 않을까? 인류의 역사를 고통의 회피(과학적) 혹은 의미부여(신학적)를 위한 온갖 수단과 방책을 모색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병철은 쓴다. “우리가 고통과 맺고 있는 관계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고통은 암호다. 고통에는 각각의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담겨 있다.”


자아와 고통이 맺을 수 있는 일반적인 관계는 고통으로부터 회피하는 방식과 고통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고통으로부터 자아가 회피하는 방식은 구체적으로 1) 마취를 통한 고통의 마비와 2) 쾌락을 통한 고통의 유예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융어는 말한다. [고통의] “선명한 그림자를 지울 수는 있겠지만, 그 대신 고통이 산란하는 빛으로 공간을 채우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이는 뇌과학적으로도 증명된 바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모든 신호는 사소한 불편조차 견딜 수 없게는 현대인의 병적징후로 나타나게 되며, 오히려 고통을 악화시키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대부분 통증을 막기 위한 진통제가 오히려 통증에 대한 감수성을 예민하게 만듦으로써 만성통증을 유발하는 악순환이 이를 예증한다.


반대로 고통을 수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와 정당화를 통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예로부터 사회와 밀접한 연관을 맺어 왔다. 니체는 손해와 고통이 등가개념으로 성립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말미암아 ‘죄(Schuld)’라는 도덕개념의 유래를 ‘부채(Schulden)’의 물질 개념에서 찾는다. 즉, 죄를 통해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계약관계”를 형성하며, 이러한 관계에서 도덕이 유래된다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현재까지 남아있는 인간 문명 최초의 법제도를 떠올려보면, 니체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한병철은 사회의 역사적 변천을 고통과 지배형태의 역학적 관계로 파악한다. 전근대 사회가 고문을 통해 고통을 직접적인 지배수단으로 사용해 왔다면, 시간이 지나 자본주의가 도래하며 생산수단으로써의 인간을 주조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고문당한 몸은 산업 생산을 지향하는 규율사회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규율사회는 고통을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대신 감옥과 병영, 기관, 공장 혹은 학교와 같은 폐쇄된 규율 공간으로 옮겨간다.” 더 나아가 현대에 이르면 고통을 의학적 · 약학적 영역으로 추방해 탈정치화하는 진통사회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고통을 마주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병철은 고통의 순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통은 정화다. 카타르시스적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2) 고통은 차이다. 고통은 삶을 분절화하여 표현한다. 3) 고통은 현실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주는 저항이 있을 때 현실을 지각한다. 따라서 쾌감과는 반대로 고통은 성찰과정이 일어나게 만든다. 고통은 정신이 더 잘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병철은 헤겔의 글을 덧붙인다.


“정신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새로운 인식에, 더 높은 앎과 의식의 형태에 도달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의 특징은 “모순 안에, 따라서 고통 안에 [···] 머무른다는 것”이다. 정신은 형성과정에서 자신과의 모순에 빠진다. 정신은 분열된다. 이 분열, 이 모순은 고통을 준다. 고통은 정신이 자신을 형성하도록 이끈다. 형성Bildung은 고통의 부정성을 전제한다. 정신은 더 높은 형식으로 발전함으로써 고통스러운 모순을 극복한다. 고통은 정신의 변증법적 형성의 동력이다. 고통은 정신을 변환시킨다. 변환Verwandlung은 고통과 결합되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정신은 동일한 상태에 머무른다. 형성의 길은 고통의 길via doloosa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절대적인 분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만 진리를 획득한다.” 정신의 위력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물러 있을 때” 드러난다. 이에 반해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 긍정적인 것”은 “죽은 가상”으로 쪼그라든다. 고통의 부정성만이 정신을 살아 있게 해 준다.”


孫潤祭, 2023.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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