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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Sep 28. 2023

《인간과 고통의 관계 II》

니체의 ‘디오니소스’는 누구인가? — 한병철 『고통 없는 사회』에 덧붙임

따라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해 줄 뿐이다—삶의 사관학교로부터”라고 말하는 니체의 그 유명한 격언처럼, 고통에 지속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신체와 정신을 고통으로 주조시키고 단련시키는 것만이 인간과 고통이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긍정적인 관계가 아닐까?


아마도 니체가 자신의 이상적 형상으로 차라투스트라와 더불어 디오니소스를 내세우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질문을 던지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과연 니체의 ‘디오니소스’는 누구인가?”


우리는 니체의 여러 저작에서 ‘디오니소스’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술의 기원을 다루는 그의 첫 저작인 『비극의 탄생』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구도와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의 구도가 핵심이 된다. 심지어는 니체 스스로가 자신을 디오니소스라고 지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자서전격인 『이 사람을 보라』의 말미에서 찾을 수 있다.


“나를 이해했는가? — 십자가에 달린 자에 맞선 디오니소스” — 박찬국은 쓴다. 그리스도교의 신과 디오니소스의 차이는 고통을 대하는 방법에 있다. 예수가 인간의 모든 고통과 죄를 짊어지는 신인 반면, 디오니소스는 어떠한 곤경도 흔쾌히 긍정하면서 가뿐하게 극복한다. 즉, 디오니소스는 가벼운 발로 경쾌하게 춤추는 신이다.


디오니소스라는 이름은 두 번(Dio-) 태어난 자(nysos)를 의미한다. 그는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 올림포스의 유일한 신이며, 신 중의 신 제우스와 인간 세멜레의 관계에서 잉태됐다. 그러나 질투심에 타오른 헤라의 계략으로 인해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그의 본모습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고,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청을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본모습으로 등장한 제우스의 강림에 동반하는 강렬한 빛과 열기에 세멜레는 타 죽고 만다. 이때 제우스는 타들어가는 세멜레의 몸에서 태아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넣고 꿰매는 데, 이후 달이 차올라 태어난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이다.


또 다른 신화적 배경으로는 제우스가 자신의 딸인 페르세포네와 관계하여 자그레우스가 태어난다. 이에 격분한 헤라는 티탄족을 동원해 자그레우스를 갈기갈기 찢고 시신을 먹게 한다. 이후 아테나가 자그레우스의 심장을 구해 제우스에게 바치고, 제우스는 이를 삼킨 채 세멜레와 관계하여 그녀의 자궁에서 자그레우스를 부화시킨다. 새롭게 태어난 자그레우스가 바로 디오니소스이다.


이처럼 사지가 찢김으로써 극단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죽음에서 벗어나 거듭 태어난다는 디오니소스의 이야기가 니체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쓴다. “그 신에 관한 놀랄 만한 신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디오니소스가 소년 시절 거인들에 의해 사지가 잘렸으며, 이런 상태에서 자그레우스로 숭배받는다는 것이다. 이 신화는 이렇게 사지가 잘린 상태, 즉 원래 디오니소스의 고통은 마치 공기, 물, 흙, 돌로 탈바꿈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개별화의 상태를 모든 고통의 원천이자 근원, 즉 그 자체로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서구 예술은 술과 축제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인 디튀람보스에 기원을 두고 있기에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거듭 태어난 이야기를 예술이론으로 확장시킨다. 예술을 통해 “개별화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존하는 모든 것의 통일에 관한 기본 인식, 즉 개별화는 악의 근원이고 예술은 개별화의 마력을 깨뜨릴 수 있다는 기쁜 희망이자 회복된 통일의 예감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니체의 디오니소스 ‘숭배’는 말년까지 이어지며, “예술, 오직 예술만이 삶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철학이 아닌 “힘에의 의지의 형태론과 발달 이론으로”서 “심리학”이라 칭하는 데,  이때 “심리학”의 본원은 —철학도 종교도 아닌— 예술에 있다. 그의 생각으로 철학과 종교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를 위해 “저울”에 다시 올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상의 황혼』의 부제( 「어떻게 망치로 철학을 하는가」)에서 볼 수 있듯, 심지어 그는 “망치”를 든다. 그가 “망치”를 드는 것은 인간 사회에 가치를 부여해 온 기존의 우상들을 파괴하고(『우상의 황혼』) 가치를 인간 스스로가 창조해내기 위함이며, 또한 인간들을 병약하게 만드는 기독교의 ‘못’을 뽑아내기 위함(『안티 크리스트』)이다.


孫潤祭, 2023.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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