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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Sep 29. 2023

《인간과 고통의 관계 III》

니체의 ‘디오니소스’는 누구인가? — 한병철 『고통 없는 사회』에 덧붙임

니체의 학문이 예술을 자신의 주춧돌로 삼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술이 평가불가능성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철학과 과학(사실과 오류), 종교(선과 악)와 국가의 법제도(죄와 벌)는 평가가능성에 기초함으로써 특정한 것은 긍정하며 발전시키지만, 다른 나머지는 부정하며 심지어는 완전히 제거하려고 한다. 이러한 평가가능성을 기반으로 ‘부정을 통한 긍정’, 즉 ‘변증법’이 기능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플라톤 이후 그리스 철학자들의 도덕주의는 병리학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변증법에 대한 그들의 존중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미덕=행복의 동일시가 의미하는 것은, 모름지기 소크라테스를 모방하여 어두운 욕망들에 대항해 영원한 햇빛을, 즉 이성의 햇빛을 산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리하고 명석하고 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본능과 무의식적인 것에 양보하는 것은 타락으로 귀결된다.”


소크라테스주의자들이 말하는 타락, 즉 “본능과 무의식적인 것에 양보하는 것”은 니체가 보기에 삶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니체는 이를 ‘니힐리즘’이라 규정하며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를 니힐리즘의 논리학으로써 파악한다. 이러한 철학에서 촉발된 니힐리즘은 서구 문화의 핵심이 되는 기독교에서도 현상하며 삶의 쇠퇴와 쇠약, 달리 말해 ‘데카당스’를 촉진한다.


들뢰즈는 쓴다. “기독교에 있어서, 삶 속에 고통이 있음”을 “삶을 정의롭지 않고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조차 부정의한 것이며 고통에 의해서 본질적인 부정의를 갚아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즉 그것이 고통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다.” 뜻 모를 고통에 처절하게 절규하는 욥의 노래가 이를 예증한다. “부르세요, 제가 당장 대답하죠, 아니라면 부를게요, 그때 대꾸하시기를. 저의 잘못 허물, 얼마만큼 되는지, 잘못 허물 제발 알게 하시지요.”  


기독교의 이 측면은 “니체가 <양심의 가책> 또는 <고통의 내재화>라고 불렀던 것을 구성하며, 따라서 “기독교적 기쁨은 고통을 <해소하는> 기쁨”이 된다. “<십자가에 매달린 신의 그 역설, 상상할 수 없는, 극도의 잔인성의 그 신비>, 바로 여기에 소위 기독교적 광기, 이미 너무도 변증법적인 광기가 존재한다.”


이와 반대로 디오니소스는 고통을 삶의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 자체로 긍정한다.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감수하고 다시 태어난 디오니소스, 끊임없이 매년 죽음의 세계에서 삶의 세계로 되돌아오는 디오니소스의 신화와 이를 기리는 주신찬가 축제(즉 비극)에서 니체는 제거도, 제외도, 선택도 불가능한 ‘긍정’의 극단적인 형태를 인식한다. 그는 쓴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란 “충만과 충일에서 태어난 최고의 긍정형식, 즉 고통과 죄 자체에 대한 그리고 삶 자체의 모든 의문스럽고 낯선 것에 대한 아무런 유보 없는 긍정”이라고. 더 나아가 디오니소스의 긍정은 고통을 신성화하기에 이른다.


“비밀제의의 가르침에서는 고통이 신성한 것으로 선포되고 있다. ‘산모의 통증’은 고통 일반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 — 모든 생성과 성장, 미래를 보증하는 모든 것이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 창조의 기쁨이 존재하려면, 삶에의 의지가 자신을 영원히 긍정할 수 있으려면, ‘산모의 고통’도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 이 모든 것을 디오니소스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절대적인 긍정의 광채 안에서 변증법, 즉 부정을 통한 긍정은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디오니소스적인 ‘그렇다’를 말할 용기와 힘은 경험의 전환이 아니라, 완전한 긍정 속에서 경험을 되찾는 것이기에.


 따라서 “나를 이해했는가? — 십자가에 달린 자에 맞선 디오니소스”라는 말하는 니체의 규정은 예수와 디오니소스의 “변증법적 대립이 아니라, 변증법 그 자체와의 대립”이 된다. 즉 “변증법적 부정에 반대하고, 모든 허무주의에 반대하며, 또 허무주의의 그 특별한 형태에” 맞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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