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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Oct 02. 2023

《IMAGE》 I — 한강

좋아하는 작가, 한강의 문체에 대한

주관적인, 매우 주관적인 ‘이미지’들 ······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 『흰』 중 「작별」


한강을 읽다 보면 꿈인 듯, 생시인 듯 모르게 선명한 하나의 이미지가 마음속 한 켠에 자리 잡는다. 딱히 그럴싸한 이유는 없지만. 그 이미지는 이러하다.


칼에 손가락을 다친다. 칼에 베인 상처는 점점 벌어지며 검적색의 피가 맺힌다. 다른 이가 보기에 끔찍한 광경이지만, 다친 이는 오히려 무덤덤하게 ‘바라본다’. ······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다시 열십자로 차곡차곡 몸들을 쌓아올렸어. 내 몸은 아래에서 두번째에 끼여 납작하게 짓눌렸어. 그렇게 짓눌려도 더이상 흘러나올 피는 없었어. 고개가 뒤로 꺾인 채 눈을 감고 반쯤 입을 벌린 내 얼굴은 숲 그늘에 가려 더 창백해 보였어. 맨 위에 놓인 남자의 몸에다 그들이 가마니를 덮자, 이제 몸들의 탑은 수십개의 다리를 지닌 거대한 짐승의 사체 같은 것이 되었어.”

— 『소년이 온다』 중.


······ 출혈은 멎어도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아물 기색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진다. 자주 쓰는 손가락이기에, 아물기는 커녕 점점 벌어지기만 한다. 상처의 폭이 벌어지는 사이를 고통이 진자운동한다. 점점 커지는 것이다. ······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 『채식주의자』 중


무덤덤한 그는 다쳤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는다. ······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 『흰』 중


그렇게 손가락을 쓰다 벌어진 상처에 무언가가 닿는다. 아,라는 짧은 탄식과 순간적인 휴지부(Pause).


한강의 소설 속 인물들이 받는 육체적 · 심적 고통이 가중될수록 문장은 짧아진다. 달리 말해, 벌어진 상처의 틈 사이로 움직이는 진자운동의 강도와 문장의 길이는 반비례한다. 고통은 멈추게 하는 탓이다.


한병철은 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고통은 한 사람의 내력 안에 들어 있는 차단Blockierung을 표시하는 증상이다. 환자는 차단으로 인해 이야기를 계속 진행할 수 없게 된다.”


문단에 내재된 쉼표와 순간적인 파우제들의 양이 고통의 크기를 가늠하게끔 한다. — 이야기의 흐름은 고통에 의해 단속斷續된다.


문장은 점점 짧아지다 못해 심지어 불완전해진다.


“싫……어……!

 처음으로, 분명한 발음으로 영혜가 고함을 지른다. 흡사 짐승 같은 소리다.

 “싫……어……! 먹기 싫……어……!”

— 『채식주의자』 중


······ 한강은 이를 전적으로 담담한 문체에 올곧이 담아낸다. —고통과 관찰의 모순 안에서.


이야기가 단속될수록,


구성하는 문장의 길이가 짧아질수록,


인물은 점차 희미해지는 반면, 문체는 절실해진다.


“아니,

언니를 만나 할 말은 하나뿐이야.

허락된다면.

부디 허락된다면.


장례식장과 응급실로, 병동과 병원 정문으로 갈라지는 도로를 밝히던 외등들이 일제히 꺼진다. 도로 가운데 그어진 흰색의 직선을 따라 당신은 얼굴을 들고 걷는다. 선득한 빗방울이 당신의 정수리에, 당신의 운동화가 내딛는 아스팔트에 떨어져 번진다.


죽지 마.


죽지 말아요.”

— 『소년이 온다』 중


孫潤祭, 2023.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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