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파일에 반 고흐의 그림들을 프린트하여 꽂아 놓기도 했었죠. 그래서인지 미술 성적은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금방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 까지도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관심은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그리지 않았죠. 그러던 어느 날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25살 정도로 기억합니다.) 눈앞에 종이와 연필들이 놓여 있는 공간에 있었습니다. 작은 스탠드의 불빛 덕분에 A4용지에 집중이 잘 되었고요. 처음으로 그렸던 것은 배우 조니뎁의 어느 흑백 사진이었습니다. 사진 속 조니뎁은 조명을 오른쪽에서 잘 받고 있었기에 어두운 부분은 안 그려도 될 것 같기에 마음을 조금 놓고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4B연필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몇 시간이 걸렸지만 누가 보아도 "조니뎁이다!" 싶을 정도로 그려냈습니다. 그 쾌감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왔기에 그날 이후로 저는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습니다. 매일매일 다른 배우들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보통은 남자 배우였지만 종종 여배우도 그려 나갔고 당시에 구입했던 스케치 북의 옆면은 점점 너덜너덜한 부분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처음 드는 생각인데요.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이유를 모르는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집중을 잘하였고 그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다른 일정이 있음에도 하루에 5~6시간을 그렸으니 말이죠. 제 나름 제가 하는 행동과 선택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좀 예외입니다.
그렇게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더디지만 꾸준히 함으로써 제가 그린 그림은 전공자들이 보기에도 꽤나 훌륭한 그림이 되었습니다. 기분은 늘 좋았지만 스스로에게는 부끄러운 그림이었습니다.(전공자도 아닌 게 무슨.) 그리고는 조금 많은 시간을 점프해보겠습니다. 31살이 되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6년 정도가 지난 시점인 거죠. 이 4년의 시간 동안엔 상대적으로 그림을 그리지 아니한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압도적으로요. 여기서 저는 카페를 오픈하게 됩니다. 처음엔 메뉴판 디자인을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비용을 지불하고 제작했습니다. 나쁘지 않은 디자인이었습니다. 가게 분위기랑도 잘 맞았고요. 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가시질 않더라고요. '이런 부분은 이랬으면 좋겠는데.', '이 일러스트는 꼭 이걸 써야 했나?' 등등 많이 아쉬웠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아이패드였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애플펜슬도 있었고 실제로 조금 그림 연습도 하긴 했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메뉴판을 디자인했습니다. 100% 수제로요. 손글씨와 손그림으로 완성한 메뉴판은 근본이 없어 보였지만 저희 매장과 하나같아 보였습니다. 포스터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사진을 찍고 아이패드로 옮겨서 그 위에 제가 원하는 폰트를 찾아서 손으로 그립니다. 이 작업 방식은 개인적으로 정말 멍청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타이핑으로 띡-띡 입력하기 싫은 마음이 컸기에 수십 배 아니 수백 배 시간이 더 소모되는 방식으로 포스터를 하나 둘 만들어 갔습니다.
항상 사진을 보고 인물만을 그리던 저는 용기를 냈습니다. 여기에 무슨 용기까지 필요하냐 할 수도 있지만 제가 창작한 그림이 별로라면 필히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하튼 저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그렸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어요. 많이 미숙한 그림이지만 이 그림은 오직 짐스에서만 살아있는 그림이 탄생했습니다. 매장을 밝히는 조명, 야외에 있는 쨍한 색의 테이블, 와인을 마시는 신사, 파랑새, 화분. 찻잔, 턴테이블과 음표들. 비형식적으로 배치해 두었고 마음을 담아 그렸습니다. 그 포스터는 2년 전에 그린 것이지만 아직도 매장에 그대로 있습니다. 모서리 한 부분은 바래졌고 곳곳이 조금씩 찢겨 나가기도 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두려고 합니다.
친구가 가게를 오픈한다고 하여 소정의 비용을 받고 메뉴판과 5장의 포스터를 그려줬습니다. 그 친구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모두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을 받았고 현재는 메뉴판은 바뀌었지만 포스터는 곳곳에 잘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친구의 가게에 필요한 로고도 제작을 해 주기도, 친구들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할 수도 있는 것이 저는 너무 좋습니다. 그림도 마찬가지로 몇 해 동안은 그리 좋은 시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전공자도 아니고 이걸로 밥 벌어먹어 살 것도 아닌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니 말이죠. 저를 그저 한량 보듯이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마냥 아무렇지는 않았겠다 싶어요. 그래도 저는 좋아하는 것을 또 꾸준히 해왔고 그림으로 밥 벌어먹고사는 것도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과 환경이 있죠. 그중에 나와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다가오는 시선은 저 멀리 떨쳐버리고 속 깊은 곳부터 원하는 그런 것들에 계속해서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