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연의 소설을 한 권 더.
왜냐면
요즘처럼 바빠 죽겠는데 머리 아픈 소설을 읽기는 좀 거시기하니까.
그리고
이 소설은 술술 읽히고 재미가 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약간은 아쉽고 허무한 기분도 든다.
마치 전에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에서 본 쌍문동 같은 세계가 이 소설의 청파동에서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빠져서 볼 때는 몰랐는데 꿈을 깨고 나면 약간은 허무해서 입맛을 다시는 그런 거?
디테일하게 현실적인데 총체적으로는 판타지. 그런 거?
내가 본 전작 '나의 돈키호테'에 이어서(물론 출간된 순서와는 별개로) 이 소설에서도 흥미 있는 캐릭터가 나온다.(이것은 작가의 재주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곰 같은 사나이, 독고 씨.
노숙자 출신이다. 우연히 청파동 편의점 사장인 염 여사의 잃어버린 파우치를 찾아주게 되고 그게 인연이 되어 편의점에서 일하게 된다.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자 전방 오른편에 GS편의점이 있었고, 곰의 목소리를 지닌 사내가 도시락에 얼굴을 묻은 채 그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분명해지는 그의 실체에 그녀는 다시 긴장의 끈을 움켜쥐었다. 대걸레같이 떡이 져 있는 장발의 사내는 얇은 스포츠 점퍼와 더러워져 베이지색인지 갈색인지 모를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 그가 매우 정성스러운 젓가락질로 도시락 속 비엔나소시지를 집어 먹고 있었다. 확실히, 노숙자다. 염여사는 마음을 다잡고 다가갔다.
염 여사는 노숙자임에도 정직하고 바른 곰 같은 사내를 편의점 야간 알바로 채용하고 이 편의점에 드나드는 여러 인물들을 감화시킨다. 처음에는 모두들 '독고 씨'를 불편해 하지만 겪어보면 독고 씨는 참 괜찮은 사람.
요즘 말로 '힘숨찐'이다.
편의점 사장부터, 알바생 시현 씨, 알바 아주머니 오 여사, 쌍둥이 회사원 아빠인 경만, 희곡 작가 인경, 염 여사의 아들인 민식, 흥신소장 곽까지 저마다 현실에서 부대끼며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가는 편의점에 곰 같은 외모를 지닌 '독고 씨'가 있다.
말까지 약간 어눌한 그는 시현 씨를 괴롭히는 진상을 퇴치하고 오 여사의 아들 고민을 해결해 준다. 현실에 찌들어 술에서 위로를 찾던 경만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희곡 작가인 인경에게 아이디어를 준다.
이것이야말로 마법과 같다.
마법사의 손길처럼 그와 접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치유해 나간다.
그리고 그의 마법은 다름이 아니라 티 내지 않는 배려, 소통. 이런 것들이다.
독고 씨는 조용히 다가와 선숙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곧 휴지를 한 뭉치 쥔 그의 손이 선숙의 눈앞으로 들어왔다. 선숙은 그가 준 휴지로 눈물과 콧물을 훔쳤다. 침도 닦았다. 그럼에도 속에서 무언가 자꾸 터져 나오는 것 같아 심호흡하듯 숨을 골라야 했다.(오 여사를 위로하는 장면이지만 딱히 오 여사에게만 해당하는 위로는 아니다.)
백곰 사내는 온풍기보다 따뜻한 말을 무뚝뚝하게 내뱉고는 사라졌다. 경만은 한동안 라면이 다 붇는 것도 모르고 소주잔만 비워나갔다.
따뜻했다.
소주도, 그 소주가 담긴 컵도. 사내가 경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했다는 온기를 주는 물건도. 경만은 왕따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왕따가 아니었다. 이놈의 불편한 편의점이 한순간에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소설의 말미에 시점을 바꾸어 독고 씨는 말한다.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지난가을과 겨울을 보낸 ALWAYS편의점에서, 아니 그전 몇 해를 보내야 했던 서울역의 날들에서, 나는 서서히 배우고 조금씩 익혔다. 가족을 배웅하는 가족들, 연인을 기다리는 연인들, 부모와 동행하던 자녀들, 친구와 어울려 떠나던 친구들……. 나는 그곳에서 꼼짝없이 주저 않은 채 그들을 보며 혼잣말하며 서성였고 괴로워했으며, 간신히 무언가를 깨우친 것이다.
우리가 잊고 살던 배려와 소통
그것이야말로 소중한 것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 소설에서 기가 막히는 표현, 문장들을 자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인물들 위에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습자지처럼 덮어 가면서 인물의 성격을 구축해 나가는 모습이 있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설정.
의문스러운 주인공의 실체를 찾는 미스터리적인 요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사건과 그 사건의 바람직한 해결(이런 게 판타지적 요소 아닐까?)
그래서 작가는 정말 영리하구나.
누구 말마따나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맞춰낼 줄 아는구나.
요런 삐딱한 생각을 했다.
물론 재미없었냐 하면 아니다. 아주 재미있었다.
그냥 트집잡고 싶어서 한 말이다. 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