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저번 주까지 읽던 소설은 나에게는 조금 버거웠다.
나의 성마른 성격에
육백 페이지가 넘는, 게다가 인물의 내면을 성찰하는 소설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 반작용으로 나는 쉬운 소설, 이미 다 아는 소설
다 알지만 제대로 읽어보지는 못한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천하에 이름난 뫼이 다섯이 있으니, 동은 가론 동악 태산이요, 서는 가론 서악 화산이요, 가운데는 가론 중악 숭산이요, 북은 가론 북악 항산이요, 남은 가론 남악 형산이니, 이 이론 오악이라. 오악 중에 형산이 유에 머니, 구의산이 남녘에 있고 동정호 북에 있고 상강 물이 삼면에 둘렀고 일흔 두 봉 가운데 다섯 봉이 가장 높고 높으니, 축융봉과 자개봉과 천주봉과 석름봉과 연화봉이라. 상에 구름 속에 들어 청명한 날이 아니면 그곳을 보지 못할러라.
옛날이야기의 시작으로는 제법 그럴듯하다.
그래서 나의 이번 주 소설은 구운몽.
게다가 한국 고전문학의 대표로 여러 나라에 번역되고 교과서에도 실리고 등등이니
한데.....
그런데......
지금 나는 좀 짜증이 난다.
기껏 책을 골라 놓고
거기에서 느낀 것은 17세기 조선 양반 남자의 욕망.
그밖에 다른 것이 있을까?라고 느끼고 있다.
비록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이 정도의 캐릭터 설정만으로도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는 충분했을 것이고
인생이란 덧없는 것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렇게 가르치는 것도 훌륭하지만
역시
내가 느끼기에는 글쓴이의 욕망을 소설로, 모조리 투영시켜 본 것 이상은 없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다.
소설의 주인공 성진은 육관대사의 제자요, 불도를 십 년째 닦고 있는 스님이다. 그는 스승 대신 동정 용왕에게 사례를 하러 갔다가 오는 길에 만난 선녀 8명과 살짝 대화를 했다가 이 때문에 인간 세상으로 쫓겨나 양소유로 다시 태어난다.
선녀 8명도 전국 각지에 이름난 미녀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소유는 그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인연을 이룬다. 하나같이 미녀에 재능을 뿜어내는 그녀들이다. 무술에 능한 여자도 있고 음률에 능한 여자도 있고 시를 짓고 또한 하나 같이 양소유만을 바라보는 정절을 장착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들은 경국지색의 미모를 기본 옵션으로 갖추고 있다.
양소유는 이 상황에서 토번을 정벌하고 황실의 사위가 되며 나라의 승상이 된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후, 자신이 본디 불가의 스님이라는 것을 깨우친 소유는 성진으로 되돌아오고
이후에 성진이 연화도장 대중을 거느려 크게 교화를 베푸니 신선과 용신과 사람과 귀신이 한 가지로 존숭함을 육관대사와 같이 하고 여덟 이고가 인하여 성진을 스승으로 섬겨 깊이 보살대도를 얻어 아홉 사람이 한 가지로 극락세계로 가니라.
완벽하게 모든 꿈을 이룬다.(젊어서는 유교적으로 출세하고 나이 들어서는 불교적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의 주제를 인생무상의 깨우침, 불교적 초월 사상과 유교적 충효 사상의 결합, 도덕적 각성과 자기 성찰의 중요성 따위의 주제로 봐야 하는가?
조선 중기 양반 남자들의 욕망의 집대성.
실패하고 싶지 않은 남자, 그 탐욕의 해피엔딩.
솔직히 딱 이 정도로 보면 왜 안 되는가?(누군가 이렇게 강요한 것은 아니고, 나혼자 이러고 있다)
문학사적인 가치는 있어도
문학적인 가치까지는 좀 거시기하다.
p.s. 어디까지나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더니 내가 꼭 그 짝이다.
전에 원하는 것을 글로 이루는 소설의 매력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는데, 왜 이렇게 김만중에 대해서만
뾰족하게 굴까?하는 생각도 한다.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에 대한 반감? 이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