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고결함: 아바타 3의 단 1초

상업적 문법과 위안의 거부

[알림: 본 비평은 영화 <아바타: 불과 재>의 주요 반전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아바타>는 축제에 만취한 영화이다. 3시간 동안 쏟아지는 현란한 색채와 고양된 감정들, 대중적 흡수를 위해 설계된 거대한 의식. 이 영화를 움직이는 동력은 ‘상업적 문법(Commercial Grammar)’이다. 즉, 한 장면이 생생한 삶으로서 경험되기를 멈추고 상품으로서 판매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모든 캐릭터는 각자 할당된 미덕에 징집되어 있으며, 모든 비트는 이미 자막이 달린 채 도착한다.

완벽한 아버지, 고결한 반군, 슬퍼하는 어머니, 오해받는 아이까지.

그들은 예측 가능한 안무처럼 움직인다.

영화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살아 있음이 아니라, 철저히 예측되어야 할 역할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각성된 상태에서 나에게 그 포화 상태의 감각들은 소음으로 읽힌다. 감정 그 자체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 감정이 이미 제품으로 가공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상업적 문법은 당신에게 무엇을 느껴야 할지, 언제 느껴야 할지, 그리고 그 감정이 얼마나 지속되어야 하는지까지 일일이 지시한다.



여기서 내가 자주 지루해지는 지점은 감동이 아니라, 감동이 봉합되는 방식이다. 특히 용서. 대중 영화에서 용서는 너무 자주 마침표로 동원된다. 갈등을 정리하고 관객의 불안을 해소하는 윤리적 결말. 음악이 대신 울어주고, 인물은 “좋은 사람”의 증명서를 발급받는다.


하지만 현실의 용서는 그렇게 매끈하지 않다. 어떤 날은 가능하고 어떤 날은 불가능하며, 말이 아니라 몸이 늦게 따라오고, 종종 용서보다 먼저 거리가 생긴다. 그래서 영화 속 용서가 위안의 장치로 작동하는 순간, 나는 감정을 느끼기보다 그 뻔한 문법을 먼저 읽어버린다. 마음이 반항하지는 않는다. 그저 졸릴 뿐.


내가 자무시, 홍상수, 린치를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감정을 정리하지 않는다. 감정을 “설명 가능한 결말”로 가공하지 않는다. 자무시는 사건 대신 시간을 남기고, 홍상수는 어긋남과 반복, 민망함과 미세한 엇갈림 속에서 인간을 그대로 둔다. 린치는 이해를 제공하기보다 무의식의 압력을 밀어넣는다. 그들에게는 위안의 문법이 아니라 잔상의 문법이 있다. 그 잔상은 관객을 설득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의 속도로 다가오게 만든다.


그런데도 웨스 앤더슨은 좋았다. 그의 세계는 철저히 정돈돼 있는데, 그 정돈이 감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디자인 같은 화면 속에 서툰 애정과 결함이 조용히 남아 있다. 위로하라고 손을 끌지 않고, 설득하듯 울리지도 않는다. 그저 “여기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감정은 강요가 아니라 그저 발견될 뿐이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팔기 위해 붙이는 자막이다.




영화 중반, 추방된 툴쿤 ‘파야칸’을 주인공의 아들이 옹호할 때, 영화는 관객의 본능적인 보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 감상은 너무나 쉽다. 위험, 구조, 카타르시스, 해방. 문법이 요구하는 전형을 정확히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 순간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당신도 반역자라는데, 그게 당신을 멋있어 보이게 만드나?


이 각성은 감수성을 무디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클리셰가 마음의 표면에 자국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놓는다.



오직 한 순간만이 실존적인 무게를 지닌 채 다가왔다. 쿼리치의 투신이다. 그것은 영화가 미처 매끄럽게 다듬지 못한 문법적 오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쿼리치의 선택은 구원(너무 쉽다)도, 희생(너무 경건하다)도 아니었다. 대신 그것은 하나의 직시로 읽혔다.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인간의 군대는 이미 그를 버렸다. 그는 행정적인 잔상으로만 생존한다.


나비족의 세계 역시 그를 흡수할 수 없다. 피부 아래의 의식은 여전히 침략자의 것—날카롭고, 비릿하며, 부족의 리듬과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더는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없고, 믿을 이유도 없다.



쿼리치는 이제 발을 딛고 설 문턱조차 남지 않은 경계인이다. 아무 데도 닿지 않는 문턱에 서 있다. 그는 두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뛰어내린다. 내 눈에 그것은 자살이나 고결함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역할 수행의 중단이었다. 다른 모든 이들이 미덕을 연기하느라 바쁠 때, 쿼리치는 연기를 멈춘다.

그 결정적인 1초 동안, 그는 상업적 문법을 거부한다. 자신을 쓸모 있게 포장하는 서사적 아크(arc)를 거부한다. 그는 상업적 문법에 소비되지 않는 존재가 된다. 위안을 주는 서사 구조의 붕괴—그 거부야말로 이 영화가 보여준 유일하게 정직한 몸짓이다.



나는 그 1초에 전율했다. 그가 선해져서가 아니라, 그가 어떤 결말도 연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짧은 중단은, “대중이 합의한 감동”보다 더 현실적인 진실을 갖는다. 인간이 어느 순간 더 이상 소속되지 못하고, 더 이상 용서로 해결하지 못할 때, 남는 것은 배덕이 아니라 중단이다. 더는 팔리지 않는 침묵이다.



금주 30일째, 어두운 극장에 홀로 앉아 나는 그의 점프를 비극이 아닌 ‘되찾음’으로 인식했다.

객석은 숨을 들이킨다. 쿼리치는 추락한다.

3시간 만에 처음으로, 침묵이 진짜가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9SBNCYkSceU&list=RD9SBNCYkSceU&start_radio=1

The Social Network OST (Trent Reznor & Atticus Ross) - "Hand Covers Bruise":서늘하고 반복적인 선율 안의 진정한 침묵.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올해 있을 좋은 일들과 새해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