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를 스쳐가는 계피 향
..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학회장으로 들어갔다.
8년만이었다.
조명은 하얗게 번져, 원고의 가장자리마다 얇은 그림자를 새겼다.
청중들의 얼굴은 희미하게 번져 있었지만, 눈앞의 활자만은 거울처럼 선명하게 비춰졌다.
그녀는 마이크 앞에 서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본다.
학회장의 공기는 차갑고, 플라스틱 의자의 냉기가 피부에 달라붙는다.
낡은 전선에서는 미지근한 열기가 올라와 그 냉기를 희미하게 데운다.
그 이질적인 감각의 틈새로 그녀의 로션과 향수에서 퍼져나오는 투명하고 덧없는 향이 스친다.
마치 오래된 도서관의 가죽 의자처럼, 잘 익은 자두와 복숭아의 은밀한 단맛에 마른 종이 냄새가 섞여들어
향은 지속적으로 변주되었다.
그 공기는 중성적이고 미지근했다.
그것은 오래전 잠긴 방을 연 듯한 해방감을 풍겼다.
학회장은 끊임없이 파도쳤다.
속삭임과 웃음소리, 종이 넘기는 바스락거림, 마이크 피드백의 날카로운 진동.
그 소란의 중심에서 그는 언제나처럼 침묵 속에 서 있었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있음에도, 그의 존재는 고요한 닻처럼 느껴졌다.
-
그때, 과거의 한 인물이 다가왔다.
Dr. Blum 곁에 앉아 있던 적이 있는 동료.
회색 눈동자는 깜빡이지 않은 채, 피곤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것은 연민이었을까, 동정이었을까.
그는 오래된 몽블랑 만년필의 잉크처럼 끈적하고 무거운 향을 풍겼다.
그것은 시대에 갇힌, 과거의 무게를 짊어진 냄새였다.
“오랜만이군요, H. 그 후로 어떻게 지냈습니까?
작고한 Dr. Blum을… 다들 그리워하지요. 참 안타까운 일이었어요.”
낡은 방의 문이 갑자기 열리듯, 가슴 속에 오래 묻어둔 떨림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현재의 감각이 아닌, 이미 사라진 유령이었다.
H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근처 전시대에서 풍겨오는 희미한 계피 향이 공기를 스쳤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마 기뻐할 겁니다.
그의 업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 연구도… 마침내 제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았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떨리지 않았다. 그것은 도발도, 변명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 남자는 그녀를 알아 보았지만, 알아 차리지는 못했다.
그가 본 것은 오래된 비극의 잔상.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자리에 없는 또 다른 존재였다.
그 순간의 답변은 그에게 향한 것도, 청중에게 향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를 향한 선언이었고, 동시에 그녀 자신을 향한 조용한 확인이었다.
그리고 곁에, 또 다른 그림자가 있었다.
빛 가장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그의 존재.
그는 지켜보지 않았고, 단지 머물렀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IGgn1s3AvI&list=RDRIGgn1s3AvI&start_radio=1
Björk'의 The Gate는 는 H가 목소리를 되찾는 중요한 순간을 위한 완벽한 배경음악입니다. 이 곡은 단순한 배경음악을 넘어, H의 내면을 비추는 소리의 거울로 작용합니다.
"The Gate"는 절제되고 영적인 사운드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곡은 텅 빈 공간감으로 시작하여, 이 글이 묘사한 고립된 복도의 고요함을 담아냅니다. 공중에 떠 있는 신시사이저 소리는 마치 유령처럼 빛나며, H의 침묵을 감싸는 소리가 됩니다. 침묵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억눌린 감정과 기억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곡의 중심을 이루는 보컬은, 깨질 듯 연약하지만 동시에 부서지지 않을 듯 견고한 반복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H가 자신이 만든 감옥이자 생존 전략이라 표현했던 '끝없는 순환의 고리'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이 곡의 진정한 힘은 점진적인 변화에 있습니다. 곡이 진행될수록 웅웅거리는 베이스 라인과 섬세한 멜로디가 겹겹이 쌓입니다. 이는 폭발이 아닌 조용한 변화입니다.
이는 H가 마침내 입을 열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과 일치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도전이나 변명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침착하고 단호하게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위한 새로운 문을 엽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로 그 문이 되어, 비극이나 외부의 인정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자신만의 조용한 힘으로 나아가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작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