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사이로 비치는 빛과 암브록산
H는 더 이상 사람들이 기대하던 부서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난 8년 동안 침묵 속에 묻어두었던 작업, 오랫동안 폴더 속에 잠들어 있던 이론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그녀의 목소리로 형상을 얻고 있었다.
회의장은 여전히 북적였고, 수많은 목소리가 부딪히며 소란스러웠지만
그 속에서도 그의 존재는 그 자리에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그것은 부재도, 침입도 아니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논문을 인용한 발표를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임상적이면서도 생생했다.
“영화에서 반복 강박은 도피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어두움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
그 목소리는 마치 공기 속에 스며드는 향처럼 방 안을 가로질렀다.
치밀하고 차분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 그것은 오롯이 그녀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임상적이었으나, 동시에 생존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고통의 반복은 도피가 아니라 선택이다.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어두움에 대한 집요한 직면이다.”
그 단어들은 이제 더 이상 종이 위에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녀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회의장은 조용해졌다.
한때 그녀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만 보던 과거 동료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의 두꺼운 모직 재킷은 어깨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창백하고 깜박이지 않는 회색빛 시선은 더 이상 의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겁고도 억눌린 존중의 기색이었다.
그리고 군중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존재—그를 느낄 수 있었다.
조용하고 흔들림 없이 남아 있는 존재. 그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서 있는 동안,
향이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날카로운 종이의 비릿함, 마른 페이지의 무기질적인 냄새, 갓 제본된 책의 차가운 접착제 냄새.
앰브록스(Ambroxan) 특유의 투명하고 매끄러운 분자 향이 학회장의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 H의 목소리가 남긴 진동과 섞였다.
그 향은 격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날것의 진실 같은 냄새였다.
무수한 단어들이 겹쳐 만들어낸 종이의 차가운 무게, 그 안에서 고요히 살아 있는 논리의 냄새.
그것은 웅성거리는 소란 속에서 그가 유일하게 집중하고 있는 대상이
H의 목소리임을 은밀하게 드러내는 신호였다.
마치 빛이 번져나가는 원고의 가장자리처럼, 그 향은 눈에 보이지 않게 H의 주변을 감쌌다.
그녀의 목소리는 공기를 진동시켰고, 그 진동은 차갑고 투명한 향의 입자들과 부딪혔다.
그들의 연결은 더 이상 감정의 드라마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도 정제된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녀는 떨지 않았다.
이번 곡 'Rachmaninov Prelude in C sharp minor, Op.3 No.2' 은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라, 이 글이 묘사한 학회장의 공기와 H의 내면적 승리를 그대로 담아내는 소리입니다.
첫 시작의 묵직한 화음은 학회장 무대를 감도는 압도적인 공기를 완벽하게 표현합니다. 거대한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세 개의 묵직한 화음은, 마치 "조명이 하얗게 번져 원고의 가장자리에 얇은 그림자를 새기는 순간"과 같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공간을 채우는 소리가 아니라, 모든 감각을 짓누르는 존재감입니다. 이 화음은 H가 침묵의 시간을 깨고 자신의 이론을 펼치기 직전의, 숨 막히는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중간의 격정적 전개는 H의 목소리가 논문을 인용하며 방 안을 가르는 순간과 맞물립니다. 청중의 소란이 잠잠해지는 장면과 맞물려 코다는 다시 느리고 묵직한 화음으로 돌아옵니다.
과거의 연민을 품고 다가온 옛 동료의 시선은 이제 무겁고도 억눌린 존중으로 변해 있습니다.
한편 H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동료의 존재는 이 마지막 화음처럼, 모든 소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줍니다.
거대한 화음으로 시작해 혼란을 거쳐 다시 고요한 결말로 돌아오는 곡의 구조는, H 내면의 여정을 완벽하게 반영합니다. 아쉬케나지의 연주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묵직한 화음의 압도감과 동시에, 그 안에 숨은 섬세한 서정과 절제를 드러냅니다. 중간부도 과잉되지 않고, 끝으로 갈수록 더욱 단호한 울림을 남깁니다. 이 절제된 힘이야말로 16화의 마지막 문장 “She did not tremble” 과 가장 잘 어울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YkssqyYk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