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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Just do it

'왜'가 아니라 '그냥'

by 돌이


6학년 교과서에 이어령 선생님의 "'그냥'이 아니라 '왜'"라는 글이 실려있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염이 긴 할아버지를 만난 한 어린이가 묻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안에 넣나요, 아니면 꺼내 놓나요?"


이 질문을 받은 할아버지는 궁금해진다. 수염을 기른 채로 수십 년을 살았지만 잠자리에 누울 때, 수염을 이불 안에 넣을지 꺼내 놓을지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그날 집에 가서 잠자리에 누워 수염을 이불 안에 넣어보기도 이불 밖으로 꺼내보기도 한다. 그러나 참 이상한 점은 수염을 이불 안에 넣으면 답답했고, 이불 밖으로 꺼내면 허전하게 느껴져 모두 어색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할아버지는 어떻게 잘 잘 수 있었을까. 꺼내놓고 잤을까? 아니면 넣어두고 잤을까?


이어령 선생님은 우리가 '그냥' 하고 넘겨버리는 수많은 일들이 할아버지의 '수염'과 같다고 말한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거나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이라는 단어로 흘려보내는 모습을 콕 집어주며, 그러면 안 된다 일러주시는 이야기이다.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9-F4qVLCVjY?si=j9xi4VNO_tiFDjZs


나에게도 할아버지의 '수염'과 비슷한 것이 있다. 내 '발'이다. 엄마와 아빠가 크게 다투고, 나와 동생이 외할머니 집으로 갔던 날이다. 너무 많이 울었고, 머리가 지끈 거리는 하루였다. 외할머니 집은 5층짜리 낮은 아파트의 1층이었고, 안방 창문 너머로 주황색 가로등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외할머니 집 안방에는 머리맡에 6문짜리 자개장롱이 있었고, 발 밑에는 커다란 3단 서랍장이 있었다. 그날 따라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주황빛이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무서운 마음에 몸을 웅크리며 발을 이불 안으러 넣으려는 순간 빛을 받아 주황색으로 보이는 내 발가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곧장 내 양발을 이불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어색했다. 무섭긴 했지만 두 발을 다시 이불밖으로 꺼냈다. 여전히 어색했다. 이어령 선생님의 이야기 나오는 할아버지가 수염을 이불 안에 넣으면 왠지 답답했고, 이불 밖으로 꺼내면 왠지 허전했던 것처럼 잠자리에 누워 내 두 발을 오롯이 느낀 첫 순간이다.


그날이 시작이었을까. 비슷하게 반복되는 하루하루 속에서 의식하지 않고 흘려보내던 것들을 하나씩 채집하는 일의 시작 말이다. 이어령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수염'이 내 두 '발'을 시작으로 점점 늘어갔다. 처음에는 '친구', '가족', '행복'과 같은 것들이었다. 진정한 '친구'관계란 무엇일까, "진짜 사랑은 무엇일까.", "나는 이기적인 존재인가.", "나는 왜 살아가야만 하는가." 등등. 특정한 시기에 나를 괴롭히는 단어들에 대한 생각들은 명확한 정답도 없이 수많은 사념들로 나를 이끌었다.


고3. 집중력도 부족하고, 배경지식도 얕았던 나는 공부하는 수능성적이 좋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야 너처럼 공부하면 그것보다는 잘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한마디 툭 내뱉기 일쑤였다. 나는 채집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답도 없는 생각들은 멈추고, 답이 있는 공부하는 데 더 열중하고 에너지를 투자하기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법을 나는 차츰 잊어갔다. 대학교 4학년, 그리고 군대에 가기 직전까지 말이다. 그때까지 나의 삶은 '그냥'이었다.


나는 군대에 가서 바뀌었다. 책을 읽고, 메모하고, 내 생각을 만들고, 내 생각을 적었다. 근력운동도 하고, 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비슷한 삶을 유지하던 내게 이어령 선생님의 글은 응원의 말씀 같았다. '잘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라.'


막연하게 마음속으로만 품어오던 꿈들이 최근에 손에 잡힐 듯이 하나씩 구체화되었다. 한 달에 200km 달리기, 단편 소설 2편 쓰기, 아침엔 달리고 저녁엔 글쓰기. 나를 가장 많이 괴롭히는 생각은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이런 것들 굳이 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달리기 해서 뭐 할 건데? 단편 소설 써봤자 어차피 나만 읽을 텐데?', '그런데 왜? 왜 내가 달리기를 해야 해? 왜 단편 소설을 써야 하느냐고?'


"왜"라는 한 글자가 내가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왜"라는 단어를 이용해, 실패할까 봐 두려운 마음, 보다 더 나태하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 "왜"라는 질문을 악용하고 있다. 이럴 땐 "그냥이 아니라 왜"가 아니라, "왜가 아니라 그냥"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당장 브런치 서랍을 열어 쓰다만 글을 마저 작성하고 발행하기 버튼을 누르자.


2025.12.07 365개의 글 중 76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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