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송도 토막살인 3

진정성있는 자백

by 써니짱

경찰서 출입 사회부 기자들은 형사 계장실이 곧 기자들 방이었다.

기자들이 계장실로 출근을 하였지만 계장이 자리에 없는 것을 이상하다 생각치 않고 있었다.

추석 3일 전 비상 경계 기간 중이라서 야간 근무 감독을 하고 출근이 늦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며 수사 중인 것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오후 늦게 계장이 사건 서류를 부산에서 가지고 와서 자술서와 같이 검토를 하고 진범 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후 과장, 서장에게 구두 보고를 했다.


사건이 워낙 중요해서 반장이 직접 심문을 하기로 하고 신빙성을 높이기 위하여 석창수의 여동생을 불러 입회 시켰다.


이 조사는 신빙성과, 임의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밀실이 아니고 형사계 중앙에 위치한 반장 자리에서 사법경찰관 경위 손00이 직접 조서를 받은 준비를 했다..


석창수가 수갑을 찬 체 얼굴을 숙이고 나오자 입회 하라고 와 있던 여동생이 달려가더니 두 손으로 손을 맞잡고

“오빠야! 아니지? 아니라고 해라”며 울면서 매달렸지만 고개를 떨구었다.


“맞다. 내가 니 언니를 그랬다.”

"왜 그랬어? 어떻게 이런 일을 했어? 진작에 말이나 하지"라며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옆에 있기가 민망 할 정도 였다.


그러는 사이 지휘 계통으로 정식 서면 보고가 안되었는데 보도가 나오니 전화 통에 불이 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저녁 MBC TV 1분 뉴스에 “1979년 발생한 부산 송도 토막 살인 사건 대구 서부경찰서에서 검거 수사 중”이라는 보도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수사 중이며 서장님께 구두로 보고를 했는데 대구경찰뿐 아니라 본청, 청와대, 검찰청까지 빨리 보고 하라고 난리가 났으며 대구경찰청청 강력 계장과 강력계 형사 6명이 직접 사무실로 왔다.


강력 계장 역시 형사를 오래 했지만 이러한 큰 사건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 욕심이 났던 모양인지 우리 계장 보고 대구경찰청에 보고도 안하고 사건을 시작했으니 강력계로 사건을 넘기라고 지시를 했다.


송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송 계장이 "내가 사표를 내더라도 이 사건은 우리 서부 형사계에서 사건을 처리 하겠다"며 버티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뒤 우리가 계속 하기로 했다.


출입 기자뿐 아니라 대구경찰청에 상주하는 중앙지 기자와 방송사 카메라도 오고 난리가 났다.

조사를 마치고 보고서를 작성 할 려고 했는데 보도로 인하여 난장판이 된 것이다.

당시는 언론 통폐합 이후라 대구에는 KBS, MBC, 연합뉴스, 매일신문만 있을 때였다.


경찰서 출입 기자들은 대구경찰청 사회부 캡들에게 혼쭐이 난 상태라 자신들에게 먼저 알려주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화풀이를 하는데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을 내고 험한 소리를 하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저녁 MBC TV 1분 뉴스가 나가게 된 것은 우리 계장이 부산경찰청 강력계에 가서 발생 당시 서류를 검토할 때 마침 기자가 있다가“저 사람은 처음 보는데 누구냐?”고 하여 “대구 서부경찰서 형사 계장인데 송도 토막 살인 사건 범인을 검거하여 기록을 가지러 왔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계장이 대구로 떠난 후 사실 확인도 없이 서울 MBC 본사에 보고를 하여 1분 뉴스에 나오게 된것이라고 했다.

기자들 등쌀에 조사를 할 수가 없어서 조사계 사무실로 옮겨 석창수의 여동생 입회하에 다시 조사를 하였다.


여러 시간 끝에 조사가 끝나고 석창수는 유치장에 입감을 시켰다.


석창수의 여동생은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이 혹시 TV 뉴스 시청하며 외삼촌을 볼까봐(당시에는 얼굴이 전부 노출되었음) 뉴스 시간만 되면 밖으로 나가 있었다고 한다.


석창수가 자백을 하였지만 부산에 있는 피해자가 처인 박계순이 맞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에 알려준 인적사항으로 경찰청에 보관중인 주민등록증 발행 당시 찍어 놓은 박계순의 지문과 사건 발생 후 확보해 둔 지문을 대조해야 하는데 손가락을 10개 전부 잘라 버렸기 때문에 지문으로 확인을 할 수가 없어서 변사체에서 확보해둔 장문(손바닥 지문)을 대조해보니 박계순이 분명하다는 회신을 받았다.


사체를 발견했을 때에는 지문이 없어 신분을 알 수가 없었지만 신분을 특정하고 나서 대조는 가능했다.


석창수의 진술과 국립과학수사 연구소 회보를 바탕으로 구속영장을 신청하여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구속영장은 당직 판사가 발부를 한다.

영장 발부 판사들은 시간이 늦으면 법원 당직 근무자가 기록을 판사 집으로 가져가 영장을 검토 후 도장을 찍는데 이 사건은 워낙 잔인한 사건이고 사진이 붙어 있어 혹시 가족들이 볼까 싶어 사무실에서 기록을 검토 한다며 집으로 가져 오지 마라 하고 직접 사무실에서 기록을 검토 후 영장을 발부하였다고 한다.


구속이 되고 난 뒤 현장 검증은 부산까지 가야 하기에 새벽부터 이루워졌다.


강력사건은 영장이 발부 되면 증거 능력을 높이기 위해 현장 검증을 해야 하는데 당시 석창수가 범행을 한 집은 도로가 생기면서 없어졌다.


현장 검증을 하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이 교통과에 협조를 얻어 교통 경찰들이 도로를 차단하고 아침부터 예전 집주인과 세입자들에게 협조를 받았다.


그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도로에 횟가루로 방이나 부엌 표시를 하고 마네킹을 사서 피해자 대용으로 사용하며 집에서 부터 동대구역, 고속버 터미널, 부산 자갈치 시장, 부산 해양고등학교 옆 유기 장소, 당감동 등에 대한 현장 검증을 했다.


발생지를 시작으로 사체를 유기한 장소까지 하나하나 찾아가 석창수의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찍고, 도면을 그려 진술을 뒷받침해서 추후 법정에서 유죄의 증거로 활용 하기 위하여 유능한 조사계 형사를 동원하여 꼼꼼하게 준비를 했다.


검증이란 강제 수사의 일환으로 “법관이나 수사관이 오관을 활용해서 범죄가 행해진 물건이나 장소의 상태를 직접 실험 인식하는 증거 조사”로서 살인등 강력 사건에는 필수 적이었다.


현장 검증을 함에 있어 6년 7개월이란 세월이 흘렀고 직접적인 증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백한 피의자가 과연 범인이 틀림없는가? 어떤 방법으로 범행을 했는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사건이 수사팀만의 일이 아닌 전 경찰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다.


담당 검사가 직접 지휘를 하는 관계로 영장없이 실시하였으며 경찰청 수사 지도관과 지방청 강력계 형사, 서부경찰서 형사 3개반, 조사계 베테랑 2명도 같이 했는데 방송, 신문등 언론도 대단했다.


우리 일행이 부산에 도착을 하자 미리 연락을 받은 부산 방송국 카메라맨들과, 기자들이 엄청 많이 모여 있어 현장 검증을 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 였다.


그래서 급하게 부산청에 공조를 요청하여 전경 1개 중대 지원을 받아 질서 유지를 하였고, 유기 장소인 해양고등학교앞 도로가 일시 마비되었다.

“저 놈 죽여라, 어떻게 마누라를 난도질을 하느냐”며 시민들의 고함과 원성이 자자했다.


#자백 #기자 #현장검증 #1분뉴스 #영장 #해양고등학교

keyword
이전 08화부산 송도 토막살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