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전말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1979. 2. 10 석창수는 평소 건축 공사장에서 목수 일을 하는데 음력설을 지내고 외지에 일을 하러 나갔다가 정월 대보름이 되어 집에 왔다.
아이들은 없고 처가 며칠째 집을 나간 후 들어오지 않아 처와 아이들을 찾아다니다가 아이들은 결혼한 동생 집에 있었고, 처는 어디 있는지 몰라 수소문을 하다가 며칠 지난 13일 오후에 동구 방촌동 시장통에서 지내고 있는 처를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왔다.
비록 단칸방에 세를 들어 살고 있지만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이들을 동생 집에 맡기고 왜 집을 나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몸에서 냄새가 나고 도대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빨리 나가서 씻고 오라고 했다.
“거지들 있는 곳에서 뭐 하고 있었나?”
“집에 있기가 심심하여 놀러 나갔지요”
“놀러 나가도 집에는 들어와야지 되는 거 아니가? 며칠 씩이나 안 들어오고.. 냄새가 나서 죽을 지경이니 우선 몸부터 씻어라”
영하의 날씨였지만 남편이 시키는 대로 부엌에서 옷을 전부 벗고 차가운 물로 씻고 들어온 처를 향해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나”며 소리를 치고 젖은 몸을 닦지도 안고 우두커니 서있는 처의 이마를 우측 손등으로 치니 비닐 장판에 물기가 있어 미끄러운 상태에서 뒤로 넘어졌다.
“ 안 일어 나나?”
“......”
일어나지 않자 꾀병이라 생각을 하고 재차
“안 일어나나? 뭐 잘한 게 있다고 지랄하나”
“.... ”
또 말이 없었다.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친 뒤 안 되겠다 싶어 밖으로 나가 동네 술집에서 혼자 막걸리를 먹으며 두어 시간 뒤 취하여 돌아왔는데도 옷을 걸치지 않고 나갈 때 그대로 누워 있어서 손으로 처의 몸을 흔들어 봐도 가만히 있어 보니 죽은 것이었다.
아마 목욕을 하고 들어와 몸에서 떨어진 물기로 인하여 미끄러운 장판에 뒤로 넘어지며 뇌진탕이었는데 그대로 나갔으니 사망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일단 사람이 죽었으니 파출소에 신고를 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집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비산 파출소 앞에까지 비틀거리며 가서 자수를 할 려고 했는데 범인은 자신이 절도 전과도 있고 해서 사건이 되면 징역을 많이 살 것 같아 뒤돌아 집으로 왔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석창수는 술에 취해 사망한 피해자 옆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술이 깨고 나니 난감하기 이럴 때가 없어 어떻게 하든 시체를 치워야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굳어진 사체를 어떻게 치울까 고민을 하다가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버리면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시체를 그대로 버리려고 하면 키 도 있고, 무게가 있어 잘라 버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시체를 담기 위하여 가까운 서부시장에 가서 두꺼운 비닐을 사서 집으로 왔다.
비닐을 사용하려고 보니 무게를 못 이기고 찢어질 것 같고, 내용물이 보여서 주인집에서 사용하던 플라스틱 제품 원료를 담는 부대(방수가 되도록 되어 있었음)를 1개 가져오고 일반 농가에서 사용하던 PVC부대를 준비했다.
낮에 시체를 자르게 되면 냄새도 날것이고 옆집 사람들도 알 것 같아서 시체를 비닐로 감싸서 덮어 두었다가 저녁이 되기를 기다리다가 밤이 되어서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밤이 되고 주변이 조용해져 옆집 사람들이 잠을 잔다고 판단을 한 석창수는 집에 있던 칼과 톱으로 방 안에서 부대에 담을 수 있도록 먼저 목과 사지를 절단하고, 지문이 있으면 신원을 알 수 있으니 지문을 없게 하려고 손가락 10개를 자르고, 얼굴을 몰라보게 광대와 눈썹 위를 뭉개 트리는 등 만행을 밤이 새도록 한 다음, 아침 녁이 되어 16토막을 낸 시체를 몸통 1부대, 머리와 사지 1부대에 담았다.
손가락 10개는 비닐봉지에 넣어 집 앞 쓰레기 더미에 던져 놓고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택시에 부대 2개를 싣고 동대구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제일 빠른 시간에 움직이는 고속버스를 찾다 보니 천일고속이어서 발권실에서 탁송할 짐이 있다고 한 후 화물칸에 실으려고 하니 화물 담당자가 뭔가 물어서 고기라고 하니 생물은 탁송이 안된다고 하여 본인이 직접 가지고 간다고 하며 고속버스에 실어서 부산으로 갔다.
사체가 굳고 난 뒤 사체를 잘랐기 때문에 피가 많이 흘러내리지는 않았고 날씨도 겨울이라 피 냄새도 그리 나지 않았다고 했다.
부산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린 뒤 주변에 있는 리어카 짐꾼을 불러 싣고는 해양고등학교 앞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없는 곳을 골라 짐을 내려 달라고 해서 짐꾼을 보내고 나서는 하수구에 밀어 넣고는 되돌아와서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로 왔다고 했다.
사체가 발견된 것은 녹두나물 공장을 하는 여주인 이 씨(당시 58세)가 목욕탕에 가려고 보니 PVC부대가 2개 있어 “누가 배달을 하려고 가져다 놓은 것인가”하고 갔다가 15:00경 돌아와도 그대로 있었다.
부대 주둥이 쪽이 붉은 끈으로 묶여 있어 풀어서 손을 넣어 꺼내니 사람의 손이 딸려 나와 기겁을 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뒤로 넘어졌다가 집으로 들어가 전화로 신고를 하고 신고를 받은 부산 서부경찰서에서는 현장에서 제일 가까운 송도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대통령의 조속한 검거 지시와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자 경찰청에서는 적극적인 지시와 독촉으로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가출인이나 행방불명된 40대 여자에 대한 수사를 했다.
피해자는 몸통과 손, 얼굴에 주름살이 많아 고생을 많이 했거나 거친 일을 하고 있는 여자라 판단을 했고, 빨리 찾아내라며 전국 경찰에 공조 수사 지시를 내리는 한편,
부산 경찰청은 피해자가 부산 시민 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통, 반장 회의를 몇 차례 하였지만 소득이 없었으며 인적 사항을 밝혀낼 지문도 없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라 신원 파악이 불발이 되었었다.
사체를 담았던 부대(시체는 비닐로 먼저 싸고 다시 PVC부대에 넣었는데 몸통을 싼 부대는 일본에서 수입한 화공 약품을 넣었던 PVC부대로서 길이 79㎝, 폭 58㎝. 겉면에는 'SEED SYLOID NICRON SEED FUGI DAVISON CHEMICAL NAGOYA JAPAN 8K'라고 쓰여 있었다. 또 다른 토막 시체를 싼 부대는 일반 농가에서 사용하는 국산 베이지색 PVC재료로 만든 부대로 아무런 표시가 없고 길이 80㎝, 폭 54㎝였다.
몸통을 싼 부대는 녹두색이며 길이 15m의 화물포장용 비닐끈(두께 1㎜)으로 부대의 윗부분과 중간 끝 부분 등 3곳을 짐을 싸듯 꽁꽁 묶었다.)에 대하여 수입 화공 약품 취급업소, 약국 등 수사를 하였지만 일본에서 들여온 플라스틱 원료 부대이고 가내 공업 공장에 공급되던 원료라 사용처 파악을 못하여 수많은 인력과 장비, 예산을 들였음에도 검거치 못하고 미제로 남겨있던 것을 7년 6개월 만에 검거하였던 것이다.
현장 검증을 마치고 당감동에 위치한 부산경찰청 시체 부검 장소에 갔더니 사체가 포르말린에 담겨 있어 그 앞에 제사상을 차려 피의자가 절을 하며 사죄를 하고 추후 그의 아들이 화장을 했다.
사자는 말이 없지만 용서를 해주지 않았을까 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토막 살인 사건이었던 범인은 사체 오욕, 사체 유기는 공소시효가 지나 법 적용을 못하고 상해 치사(공소 시효가 7년으로 4개월 남았었음)로 구속 송치, 10년 형을 받고 수형 생활을 3년 하다가 간 질환으로 가 석방되어 여관에서 홀로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 했다.
(범행 뒤 6년 7개월을 괴로워 술로 세월을 보내는 바람에 간 질환이 있었다고 함)
당시 특진이나 시험, 심사 승진이 없던 시기인데도 1985, 12, 17일 조장인 임0린 경장은 경사로, 저는 경장으로 특진을 하게 되고 사건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형사들은 장관 표창, 경찰청장 표창, 지방청장 표창, 서장 표창 등 모두 표창장을 받았고, 수사 관련 서류는 경찰청에서 잘된 사례로 발표되기도 했다.
사건을 처음 제보한 공달이 에게는 약간의 수고비(?)를 주었고, 박우철은 검사의 수사지휘를 받아 불구속 송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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