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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짱 Feb 24. 2023

계급이 깡패다!

조직사회의 계급

지금의 군 생활은 어떻게 변하였는지 모르지만(지금도 유효 하다고 생각됨)

아무리 많이 배우고 유학을 다녀 올 정도로 똑똑한 사람도 쫄병으로 들어오면 고문관이 되어 일자무식인 고참의 지시에 따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계급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요사이 말하면 ‘갑’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 생활하는데 하나의 방법이 아니겠나 싶다.


특히 계급이 눈에 보이는 군인, 경찰, 소방, 교정직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공무원, 회사원 할것 없이  상, 하가 있는 직장인들은 모두가  공감하는 말일 것 같다.


정해진 서열대로 행하지 않고 이를 무시한다면 크게는 역적이 되는 것이고 적게는 하극상이라고 하면서 그에 대한 응징은 역사에서 보듯이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등 대단하며 뒷감당을 준비해야 한다.


태어나서부터 조직에 순응을 해야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익힌 우리 인간들을 포함하여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원숭이나  하이에나 같은 둥물들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서열(계급)이 존재 하고 있다.


살아 남기 위하여는 어떻게 하던지 간에 조직에서 원하는 방식에 따라 살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능력을 발휘하여 올라가야 했다.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승진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하였던 나는 꿈을 위하여 다시 움직이기 시작 했다.


경사로서 형사반장을 하셨던 아버지는 직장에서 무슨 일을 겪어셨는지 술을 한잔 드시고 들어오시는 날에는 여지없이 “그놈의 금티, 그놈의 금티(예전에는 경위가 되어야 간부가 되고 정모에 금티를 둘렀음)라며 목청을 높이시며 계급을 한탄 하셨다.


나는 어떻게 하더라도 아버지가 원하시는 금티를 쟁취하겠노라고 어린 마음속에 맹세에 맹세를 해두었던 터라 계급이 깡패라는 것을 일찍 깨우친 나는 승진을 위하여 처절하게 행동하였던 일화를 한번 올려보기로 했다.


형사를 시작하며 1년 만에 부산 송도 토막살인사건을 6년 7개월 만에 해결(앞에 연재된 ‘손가락10개를 찾아라’)하면서 경장으로 특진을 하고, 다시 5년 뒤 노숙차량 전문 절도단 검거(‘길에 세워둔 화물차량’연재)등 여러가지 사건 해결로 경사로 특진(‘이제는 말 할 수 있다’로 연재)을 하면서 대구 역대 형사들중 최단기간에 경쟝, 경사 특진을 하면서 줏가를 올렸다.

(예전 아버지 휘하에 근무 하시던 모 형사가 아무리 계급 사회지만 나보다 계급이 낮아 여러가지로 곤란을 겪었다.) 


그렇게 하나, 둘 노하우를 쌓아가며 공적을 올리다가 지방경찰청 폭력계로 스카웃 되어 명성을 높이고 실적도 많이 올렸지만 전국에서 알아주는 삼재 형사들(앞 보스 출소 환영식 부분에서 언급했음) 밑에서는 추월하여 승진은 꿈을 꿀 수가 없었다.


계급사회에서는 계급이 깡패이며 인격이었다.


경사라는 같은 계급의 선배들이 6명중 4명이나 내 위에 있는데 특진이나 심사승진은 어려웠고 시험을 친다고 해도 고과점수가 좋아야 승진을 할 수 있는데 언감생심 말도 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교사를 그만 두고 경찰시험을 치를 때는 뜻이 있었고, 꿈이 있었기에 시도를 했고, 꼭 승진을 빨리 하고 싶었는데 승진 시험은 하루 이틀 준비해서 안 되기에 공부 보다는 일을 열심히 해서 특진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경장, 경사 특진은 각 경찰청에서 몇명씩 할 수 있었지만 경사에서 경위로 특진은 간첩을 잡거나 국가의 중대사를 해결했거나  큰 공적이 있는 전국 경찰관 중 경사들에 한하여 일년에 한번 그것도 손에 꼽을정도(예전엔 조선일보에서 청룡봉사상 중 형사에게 해당되는 포도왕에 선출되면 경위 특진)라서 어지간히 일을 해서는 승진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느니 보다 체질과 성격에 맞는 범죄자 검거가 승진에 더 빠를것 같아 가던길을 계속 가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박00 강력과장(당시는 형사과가 아니고 강력과였음)에게 승진을 하기  위해서 내가 근무를 하던 서부경찰서 형사계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래 니 생각이 맞다. 경사 천명, 만명 있어도 영장 청구 권한이 없는데 경위는 사법경찰관이니 도장만 있어도 무슨 영장이던지 청구 할 수 있으니 승진을 해야 한다. 공부하기 좋은 형사기동대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나는 형사기동대 외근 반장과 행정반장까지 했는데 다시 그곳을 가기는 싫어 내가 근무를 하였던 서부경찰서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런 부탁을 하지 않으면 내가 일을 못해서 쫒겨 나는 꼴이 되어 원하는 곳이 아니고 엉뚱한 곳으로 발령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부탁을 한 것 이었다.


마음을 굳힌 상태인 나는 그렇게 알고 발령을 기다렸다.


인사발령이 있으니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려워 그냥 출퇴근 하며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공무원의 인사이동이라는 것은 혼자만 발령을 내는 게 아니라 지방청 전체 경위 이하 비간부(경사이하) 인사를 할 때 같이 한다.


내가 나간다고 하니 내 자리에 들어 올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부 빽을 써는 바람에 선별을 못하여 인사가 일주일이나 늦어져 할 수 없이 1명이 교체되어야 하는 인사인데 TO에 없는 2명이나 더 폭력계로 발령이 나는 이상한 인사가 있었다.


당시 지방청 폭력계는 일을 많이 하면서 시내 조폭들에게는 염라대왕 같은 존재라서 어디를 가도 특급 대우를 받았던 시절이라 시내 형사들에게는 최고의 보직이었다.


그렇게 해서 서부서 형사계로 발령이 났는데 사람은 ‘용꼬리 보다는 뱀 대가리’라고 서부서에서는 내가 또 정보원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상사들이 원하는 실적을 올렸다.


그렇게 실력 발휘(?)를 해서 00파 조폭을 만들고도 일을 열심히 해서 쾌 이름을 ‘펄펄’날리고 있는데, 하루는 아침에 출근을 하니 강력계에 근무를 하던 고참이며 나를 챙겨주던 선배인 손 형사에게 전화가 왔다.


“야! 김 형사! 축하한다.”

“예! 형님 뭔데요?”


“너 폭력계로 발령났다.”

“무슨 폭력계요?”


“인사발령 결재가 나서 경찰서로 하달되었으니 상황실에 가서 팩스 확인해봐라”

“예 알겠습니다.”하고 상황실에 가보니 서장님 결재 들어간다면서 상황실장이 결재대를 들고 나오는 것을 확인하니 진짜로 폭력계로 발령이 난 것 이었다.


(형사들은 일반 회사나 경찰의 다른 부서와 달리 나이나 경력을 기준으로 선, 후배가 가려지면 마치 조폭들 같이 ‘형님’. ‘동생’으로 부른다.)


내가 나오고 폭력계가 로비로 들어온 형사들이 제사 보다는 젯밥(?)에 눈독이 들어있으니 잘 돌아갈 리가 만무하였다.


마약사범 사건을 하는데 현장검증을 한다면서 피의자를 데리고 갔다가 피의자를 놓쳤다가 잡았고, 그놈이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책상 유리를 깨어 자해 행위를 하는 등으로 문제가 생겼다.


언론에서‘멍청한 경찰’이라며 비난 기사가 나가자 청장이 화를 내면서 반장을 포함한 폭력계 외근 전원을 각 경찰서로 한명씩 흩어지게 인사를 하며 바꾸라고 지시를 했다.


 퇴근 후 부랴부랴 인사위원회를 열어 시내 형사 500명을 상대로 실적조사와 인성검사를 해서 아침 청장이 출근을 하면서 결재를 했다는 것 이었다.


다시 폭력계에 발령이 나서 가보니 나이가 많은 선배 형사가 2명 있었지만 내가 경사 중에 제일 고참 이었고 과 전체 100여 명 중에서도 서열이 두 번째였다.


내가 그때 선배들 밑에서 계속 근무를 하며 있었다면 쫓기어 날 수도 있었고 집과 거리가 먼 동부경찰서로 갈 수도 있을 것인데 마음을 비우고 나간던 것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았다.


폭력계 외근이 1/6명이었고 반장부터 전원 물갈이가 되었는데 나는 조원인 배 형사와 같이 가게 되었고, 내가 폭력계에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 여러 가지로 일이 많았다.


폭력계 외근들이 바뀌었지만 전에 있던 형사들보다 경력이나 실적, 인지도 가 낮았다.


외근들이 바뀌고 나서 시내 조폭들 관리를 못한다면 조롱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 들어간 폭력계에서도 일을 열심히 하여 00파 조폭 검거, 강력계에서 일을 하다가 중간에 우리 폭력계에 넘긴 달성 살인사건, 회장 납치사건 등 여러 가지 중요 사건을 해결하고 지휘부에 신임을 받았다.


본청에서 경사에서 경위 특진이 내려와 내가 대구청 대표로 특진을 상신했는데 전국에 1명을 뽑는 특진에 실적은 내가 제일 우수 했는데 + α(?)가 안 되었다.


그것을 안 이 00과장(작고)이 “특진 안 되면 내가 심사로 시켜주면 되지 않나?”고 했지만 기본적으로 점수를 만들어 놓아야 하는데 나는 일만 열심히 했지 첩보나 과제물 제출, 조회 참석등 기본적인 점수관리를 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형사들은 신병 처리 문제로 시간을 다투거나 긴급한 증거수집등으로 일을 할 때는 밤, 낮이 없이 바빠 행정적인 행사 참석이 어려웠음)  


그런데 승진 인원이 전년도 보다 많아지면서 내가 배수 안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과장실에 들어가


“과장님 배수 안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 알았어 나가봐” 하였는데 심사 발표 때 내 이름이 있었던 것 이었다.


이 00과장이 총경 고참이었고 나이가 있어 막후 입김(?)을 불어 넣었던 것 같아 고마웠다.


경위는 경찰내 간부 중 제일 낮은 계급이었지만 사법경찰관으로서 정모에 황금색 띠를 두르는 것 이었고 아버지가 생전에 바라시고 바라시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별세하시고 안 계셨지만 어릴 때부터 꿈꾸워 왔던 아버지의 평생 한을 풀었다.


나보다 9살이나 많은 형이 같은 경찰에 있지만 내가 먼저 경위로 승진해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감사하고 감사했다.


비록 형의 승진이 나보다 늦었지만 그동안 형님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후 형은 아버지 6형제의 사촌이 44명 되는 대 식구의 집안 대소사에 일체 가지 않고 나에게 가라는 것 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이 승진을 못했으니 집안 어른들이 형만 보면 ‘동생은 경위를 달았는데 자네는 뭐 하냐’며 농반, 진담반으로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 이었다.


다음해 승진 철이 되어 내가 서부경찰서에서 경사 특진할 때 과장을 했던 채00 서부서장을 찾아가서 “서장님! 나 좀 살려 주이소. 형님이 승진을 못해서 나보고 자꾸 집안 대소사에 가라고 해서 돈도 없는데 죽을 지경입니다. 요번에 형님이 꼭 승진을 해야 한다”며 로비를 했더니 그 덕인지 몰라도 경찰서에서 2등으로 승진을 했다.


내가 승진한 것 같이 너무 좋았다.


그 뒤부터 집안의 대 소사는 형님이 다 가셨다!


승진을 하게 되면 경비부서를 1년 가야 하는데 형사출신들은 사복근무를 하는 형사기동대를 선호했다.


형사기동대는 지방청 형사과장 지휘하에 지방청에 근무를 하고 있어서 근무자 추천은 형사과장이 했다.


과장에게 다시 형사기동대로 발령을 내달라고 부탁을 해서 형사기동대로 가게 되었는데 형사과장님은 “이제 처음 시작하는 4기들 교육을 잘 시켜 자네 같은 형사가 되게 만들라”는 지시를 했다.


형사기동대 1기부터 3기까지는 무도요원들을 특채식으로 채용하여 시위나 다중범죄 진압에 투입을 하였으나 3년이 지난 3기와 교체를 할 4기는 경찰인원 증원에 걸려 30명만 채용을 하였고 나머지 인원은 지원자와 나이순으로 차출을 하여 1개 중대 편제였다.


그렇게 운영을 하다가 6개월이 지날 즈음에 형사기동대를 기동수사대로 편재를 바꿨다. 지금의 광역수사대 모태가 되었다.


형사기동대로 계장(소대장)발령을 받고는 일선 파출소나 형사계에서 제일 필요한 인지보고서, 수사보고서, 피해자 진술조서, 피의자 신문조서, 압수수색영장과 목록 작성등 교육을 시켰다.


예시를 주고 답을 작성해 오면 하나하나 잘잘못을 지적하며 재작성 하라고 하는 등 실무에 바로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교육기관인 경찰종합학교에서 배워왔지만 교육기관하고 실무에서의 교육은 엄청 차이가 있기 때문에 습득하는 효과가 상당히 빨랐다.


그리고 나서 일부는 6개월이 지나 일선 파출소에 배치가 되었는데 기존에 있던 파출소 요원보다 서류를 더 잘 만드니까 칭찬을 많이 받았고 나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기수가 대구 시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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