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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Sep 21. 2023

곰팡이 필 무렵

<집 쓰기2>


한남동이라곤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평창동’처럼 저택들이 있는 동네정도로만 알았다. 생각해 보니 오래전 비자 때문에 대사관에 들리러 딱 한번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여긴 빌라도 으리으리하구나‘였다. 이 동네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막연하게 만드는 집이었다. 그런 한남동에 내가 들어가 살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싶었다. 비록 그때 점찍어둔 집은 아니었지만, 있었다.

‘재개발’.

 







십 년 전, 첫 방문 때 보다 힙한 가게들도 늘어나고 재개발 진행이 현실화되어 땅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 곳에서 내 주소지가 한남동이 될 수 있었던 건 재개발이라는 등급이 붙어있는 집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집을 보러 가는 날 현 세입자가 자리를 비운 상태라 나는 옆집 아저씨의 동행 하에 집을 둘러보았다. 가계약을 했고 이후 부동산 중개사 없이 임대인과 나와의 계약이 진행되었다.

계약에는 두 가지 조건이 따라붙었다.

계약기간은 숫자가 아닌 입주부터 이주 시작이라는 공고가 날 때까지로 정해졌다. 예상보다 너무 빠른 이주는 추가비용과 번거로움이 따라오지만 무기한 미뤄지는 것이 또 재개발 아닌가. 그렇게 나는 불확실성을 안고 들어서게 되었다.

묻고 더불로 가는 것도 아닌데 조건이 하나 더 붙었다. 이 집은 더 이상 수리 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돈이 들어가는 수리는 못해준다고 하셨다. 이 또한 나는 없으면 없는 대로 만족하는 법을 터득해 가고 있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전문가 수준은 아니지만 손으로 뚝딱뚝딱하는 걸 좋아해 나쁘지만은 은 조건이었다.

 

그렇게 9월 중순. 몇 가지 짐을 챙겨 들어왔을 때 마주하게 된 벽지는 공포 그 자체였다.
지름 2cm의 철근이 나뭇가지처럼 벽안에서부터 몇 줄기씩 뻗어 나왔다. 날 것 그대로의 인테리어(?)였다. 공사장을 방불케 하는 흉측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보다 내 마음을 더 힘들게 했던 건 군데군데 퍼져있는 시커먼 곰팡이였다. 계약서를 그대로 무르고 싶은 정도였지만 그러면 무얼 하겠는가. [수리불가]라 했던 임대인의 말이 떠올라 락스물과 걸레를 챙겨 쓱쓱 싹싹 문질러 보았지만 화석이 된 곰팡이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집을 보러 왔을 때의 세입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곳곳에 커다란 캔버스가 가득했다. 그림은 집을 예쁘게 보이게도 했지만 곰팡이를 가려주기에도 충분했다. 나는 짐이 다 빠진 이삿날에나 곰팡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을날은 빠르게 흘러갔고 이곳에 온 시간 동안 나 역시 적응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가졌던 걱정과는 달리 거뭇한 곰팡이는 벽지의 문양이 되어 다행히 날리거나 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예민하게 굴던 찝찝함도 무뎌졌다.

사실 노후된 보일러 배관은 넉넉한 평수에 못 미쳐 겨울철이면 집안에서의 활동 범위가 좁아졌고 히터 앞에만 있다가 피부가 데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런 단점들이 장점이 되는 신기한 점은 보통 겨울 곰팡이는 추운 날씨의 바깥과 따뜻한 실내의 온도차로 생기는데 이글루 같은 우리 집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봄비가 오고 습해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보일러를 틀어도 2.5평 정도의 작은방에만 온기가 돌았다. 넓은 방을 놔두고 굳이 작은방을 침실 겸 생활공간으로 삼은 이유다. 싱글침대와 책상이면 가득 차는 방에 옷까지 둘 자리는 없었다. 경제력에 따라 옷에 대한 관심도를 애써 줄여갔는데 결국 이렇게 옷장은 큰방에 놓이게 되었다. 

단출해진 옷가지 덕분에 큰 방에 들어갈 일은 거의 없었다. 긴긴 겨울 동안 곰팡이에 대해 무뎌지고 방심한 사이,

날이 풀리면서 옷을 교체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두꺼운 옷들은 가지런히 놓아놓고 봄에 맞는 옷들을 꺼내 입었다. 바깥은 꽤 따뜻했지만 여전히 바닥이 차디 찬 큰방은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그러다 한 번 두 번 비가 오더니 본격적인 장마철이 되었다. 불을 켜도 컴컴했던 그 방에서 하얀색 눈꽃이 눈에 띄었다. 뭐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기모가 들어있는 옷 여기저기에 피어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곰팡이라는 녀석이었다.

옷을 들춰보니 사태가 심각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일그러지고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곰팡이는 그런 녀석이었다. 장마가 끝나고 태양이 뜨거운 날이면 입지도 않은 옷을 재세탁하거나 휴일이면 마당에 내놓기도 하는 일이 일과였다. 습기를 머금는다는 숯을 한 박스 사다 놓기도 했지만 곰팡이와의 소리 없는 전쟁은 매년 반복되었고 매번 처치를 해야 했다. 

곰팡이 필 무렵이 오면, 나의 잠자코 있던 찝찝함이 다시 도졌다.



나는 이 집을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가습기라는 존재를 알게 된 것은 3년 차 되는 해에 이주 시작을 앞둔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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