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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Sep 24. 2023

나와 같은 너

<집 쓰기 3>

나는 줄곤 우울감에 빠지곤 했다.


이십 대의 나는 영화를 좋아해 영화인이 되고 싶었다.

거친 사람이 많은 산업에 몸 담고 있으려면 무모하거나 그릿(grit)한 자질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렇지 못한 나는 영화 현장이 싫었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무서워했다. 

차라리 포기라도 하면 그만인 것을 꿈을 버리지도 못한 나는 어느 순간 방에서 날마다 울고 있었다.



곰팡이가 주인노릇 하는 집에 들어가게 된 다음, 나는 내 인생 리셋에 들어갔다.

'잘 산다'가 아닌 어떻게든 살아보자, 살아내보자라는 다짐으로. 

얼마 안 되는 인간관계마저 정리하고 빈손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라는 다짐으로.


원체 몸이 약해 풀타임은 무리를 느꼈다. 지루하거나 스트레스받지 않을 것 같은 파트타임으로 일을 구했다.

월세를 충당하고 생활할 수 있는 최소 소득 수준이지만 '잘 산다'가 아닌 어떻게든 살아보자, 살아내보자라는 다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남동에서 일터가 있는 압구정으로 가는 길은 한남대교만 건너면 됐기에 대부분 도보로 출퇴근을 했다. 힘든 일이 있어도 탁 트인 풍경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나 스스로 위로를 얻는 시간이었다.  

영화 현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처럼 거칠지도 않았고 정식 직장이라 할 순 없지만 일을 다니는 게 즐거웠다.


거기서 통통 튀는 매력을 가진 Y를 알게 됐다. 그는 연기 전공자였는데 졸업과 동시에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자신의 재능을 펼칠 무대가 사라져 잠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관심사가 비슷해 언니, 동생으로 부쩍 가까워졌고 좋아하는 일을 같이 도모하기도 했다.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그는 나의 공간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자신이 쓰게 될 시나리오를 이곳에서 촬영하고 싶다고 했다. 나의 눈물과 외로움이 묻는 공간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재개발로 곧 사라질 이 집을 영화로 담아놓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연출은 처음인 그를 도와 시나리오와 촬영 영역에서 스태프역할을 자처했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만들어가는 영화는 열정을 돋울 뿐이니까. 

내가 처음 영화를 하기로 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가 스물다섯 살이었고 아이돌과 한 소녀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어찌저찌 완성한 그 영화는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내 머리에서 어떻게 그런 게 나왔는지 너무 부끄러워 출연해 준 배우들에게만 예의상 파일본을 돌리고 데스크톱에 오 년간 묵혀있다가 컴퓨터를 버리면서 사라져 버렸다. 당시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지만 한참 후에는 누구에게나 처음은 그렇다고 믿으며 토닥였다. 그런 기억이 떠올라 결과가 어떻든 일단 도전한 것에 큰 의의가 있을 거라고 A에게 말해주었다.

그의 부모님과 언니, 할머니 그리고 나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용기를 응원하는 단 하나의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 영화는 크게 시나리오, 촬영, 편집 단계로 나뉘는데 모든 게 처음인 그는 '언니를 만나게 되어 난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야.'라고 했다. 

그래, 내가 그만큼 그에게 도움이 된 거겠지. 뿌듯했다. 

내가 그에게 복이 된 것뿐 아니라 추후에 나도 그로 인해 복을 얻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본가에서 살 때 알던 지인인 S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 무대연기를 했던 사람이라 지금까지 가느다란 연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는 최근 매체연기로 전환해 가는 과정에 있었고 그간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만나게 되어 기뻐했다. 그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같이 작품 활동을 하자고 제안했을 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만남이 집이 가져다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환경이 중요해.' 서울에 오고 나니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는구나. 싶었다.

피카소가 피카소가 될 수 있었던 건 엄청난 연습량이었다고 한다.

다시 찾아온 열정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퀄리티보단 양에 우선하기로 했다. 그만큼 여러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컴퓨터 저장공간을 뒤져 스무 살 초반에 쓴 글들을 살펴봤다. 짝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시 한 편을 택해 영화용 시나리오로 수정했다. 

시나리오는 혼자서도 쓰지만 이후의 과정은 최소한의 인원이 필요하다. S와 촬영을 약속한 나는 편집을 끝낸 Y에게 연락해 스태프로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지만 Y는 자신의 작품에만 관심을 보였다. 결국 우린 2인체제로 진행해야 했다. 

장마철에 잡은 촬영 스케줄은 날씨에 의해 몇 번이나 변동되어 슬금슬금 피어나는 곰팡이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6월 말 나는 영화를 찍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밑천 안에서,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후지 미러리스 카메라로, 연기자 한 명을 두고, 혼자서, 촬영을 했다. 포기라는 벼랑 끝에서 다시 걷는 걸음이었기에 부족함에서 오는 아쉬움은 없었다. 다음 스텝을 위한 힘찬 걸음일 뿐이었다. Y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내 집을 담을 수 있어서 좋았다.










계절이 바뀌자 Y는 첫 번째 영화로 서울 국제 영화제에서 시상을 하는가 하면, S는 공모전에서 제작지원을 받아 자신의 사람들과 영화를 찍었다. 

영화를 같이 만들어가고자 했던 둘은 각자의 명성을 쌓아갔다. 나를 만나 그들은 연기에서 연출의 영역으로 넘나들었다. 또다시 나의 인맥은 유에서 무로 전환되었다. 

이런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큼 나는 강하지 않았다. 그들을 축하하는 미소에 경련이 일었다. 그래서 계속 웃으며 대할 수 없었다. 종종 그들은 연락을 해왔지만 나는 더 이상 그들의 경력을 위해 나의 노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이 찾아왔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처량함을 안주삼아 우는 것뿐이었다. 울다가 쓰러져 잠들어버리면 그나마 낫고. 이런 나의 비참한 모습을 아는 것은 오로지 집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들어주는 좋은 경청자. 집은 팔이 없지만 작아진 나를 지그시 안아주었다.

실질적 포옹은 아니지만 이전만큼 우울이라는 동굴 안에 오래 머물지 않을 힘을 얻었다. 의욕도 곧잘 돌아왔다. 

한남동에는 남산과 한강이라는 좋은 친구들이 있어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가 걷기도 했다. 낮이라면 햇빛을 쬐고 밤이라면 불빛을 보기도 하면서 산과 강을 따라 걸었다. 배신이라는 감정의 키워드는 점점 지워졌다. 

산책을 하다 보면 나처럼 혼자인 사람들이 있다. 모두들 나보다 더 잘 사는 건 아닐 테지만 모두들 땀을 흘리며 걷고 있었다. 걷는 행위를 통해 고된 하루를 이겨내고 있었다. 나를 앞질러가거나 맞은편에서 마주 오는 그들의 얼굴에 맺은 땀을 보면 무언의 위로가 채워진다. 전에 없던 용기가 일어난다.




어둡고 습한 곳이 제격이라는 듯 군데군데 피어있는 곰팡이를 보다가 Y의 말을 곱씹게 되었다.

'언니를 만나게 되어 난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야.' 이게 무슨 의미일까...

2023년 8월. 누구보다 빠른 이주 준비를 시작할 때쯤 그 말의 진짜를 알게 됐다.

나는 누군가에게 복을 끌어다 주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을. 나의 인복은 내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말이다. 

사라져 가는 집이 그의 마지막 세입자인 나의 안녕을 바라며 이렇게 인사한다. 

'새로운 곳에서 너만의 명성을 쌓아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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