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se that from the concrete
모닝 페이지의 시작.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거르고 다듬지 않은 뇌 속 생각들을 글로 풀어낼 것이다.
떠오르는 대로 솔직하게, 최대한 빠른 속도로.
어법이 맞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 생각의 불순물들을 예쁘게 포장할 필요가 없다. 그냥 쏟아내기만 하면 된다.
이 글쓰기가 쌓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 안에 예술 본능을 마주하게 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벚꽃이 지고 본격적으로 봄이 찾아오던 오월에 한 커뮤니티에서 열린 극작가 안톤체호프의 작품 <청혼>을 리딩하는 액팅 클래스에 참여했다.
원래는 1회 참가비가 오만오천 원이라 그동안 온라인 장바구에만 담아두었는데 첫 참여자에 한해 1만 원 특가 기획이 떴다. 일단 신청해 놓고 보았다.
모임위치, 금액, 취지 다 좋은데 작품이 희극이라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왜 내게 비극 대본을 주지 않는 거냐!?'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희극은 내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목소리가 주는 영향인지 외모가 주는 영향인지(아마 둘 다 이겠지만) 차분함이라는 꼬리표는 어느 자리에나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명랑하고 소란스러우며 활기찬 분위기를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대본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신감이 낮아지고 흥미도 썩 오르지 않았다.
결국 모임 시작 전까지 대본도 미리 읽어보지 않고 건성건성하는 태도로 가게 되었다.
시작 시간 십 분이 지나 도착했더니 차갑고 흰 형광등 아래 모여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진 게 없는 만큼 자랑할 거리가 없어 나를 소개하는 자리는 무척이나 곤란하다. 특히 소개팅 자리가 그렇다. 자신이 하는 일과 업적을 단시간에 공유한 뒤 이후 더 서로를 더 자세히 알아가는 자리인데 그간 베짱이로 살아왔다고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러니 그 자리가 내게는 너무 곤욕인 것이다.
쨌든, 그날은 다행히 공식 질문이 있어서 그에 맞게 본인을 오픈하면 되었다. 각자 닉네임을 만들어오라는 미션이 있어 나는 '피어다'라는 이름을 정했다. 봄이 되고 길거리에 예쁜 꽃들을 자주 보아서인지 [꽃이 피다]라는 동사 격을 인용했다고 하니 모임을 이끄는 리더였던 강사님이 찬사에 가까운 격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오잉? 스타트부터 기분이 좋아지네?
본격적 리딩에 들어가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 몸게임을 했다.
풋풋했던 체육시간이 떠올랐다. 서로 박장대소하며 게임을 즐겼으나 다시 자리에 앉으니 눈 맞춤이 어색하기만 했다. 선생님이 한 명씩 캐릭터를 정해주었다. 연기의 강도는 본인의 의지에 맡겼다. 가볍게 읽는 이도 있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이도 있었다. 그중에 분명 꿈이 연기자가 되는 거라 예상된 사람도 몇몇 있었다. 다른 이들의 연기를 보는 건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다. 대본이 희극이었기에 덕분에 많이 웃었고 그 웃음 속에서 긴장과 공기의 탁함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나는 첫 번째 리딩에서 4 막장의 아버지(로모프) 역을 맡았다. 연습을 하고 오진 못했지만 낯선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해낸 것에 박수를 쳐주었다. 나 스스로. 속으로.
잠깐 휴식시간에 대각선 자리에 앉은 한 남성이 내게 대뜸 '성우세요?'라고 했다.
훅 들어온 질문에 놀라긴 했지만 번져지는 기분 좋음을 티 내지 않으려 했다.
두 번째 시간은 나란히 앉은 사람들과 조를 이루어 배역을 정하고 얼마간 연습 후 발표하는 것이었다.
이번엔 대사가 가장 적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다른 두 사람의 단조로운 연기에 집중이 흩어져 내 차례의 대사도 자꾸 놓치는 일이 발생했다. 난 이 상황이 부끄러웠다.
나야말로 단조로움의 끝판왕인데. 감정기복 없이 톤의 일정함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지루함을 주기도 하는데 이런 내가 다른 사람의 그것을 논하다니.
조원들이 대사를 주고받는 동안 나는 떠나간 집중력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희곡의 내용은 청혼하러 간 남자는 땅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여자 쪽과 말다툼을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연기를 해보겠다는 이들은 모두 일정하게 화를 냈다. 연기를 모르는 이가 연기를 하려고 하면 전형적인 연기가 나오게 되는데 그런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강사님이 발표 중간에 각자에게 코멘트를 주면 자신 안에 다른 톤의 연기가 나오는 것을 경험하며 발전해 갔다.
우리 조는 마지막에 발표하게 되었는데 시간관계상 내 역할의 대사는 더욱 삭감되었지만 상대방의 대사를 경청하는 연기에 집중했다. 강사님은 분명 날 눈여겨보았으리라. 아닐 수도 있지만 95% 확신한다.
내게 무언가 다름을 느꼈을 것이다.
모임은 끝났지만 긍정적인 호응에 모두가 뒤풀이에 참석했다. 옆자리에 앉게 된 강사님은 내게 질문을 하셨다.
"피어다 님은 연극 많이 보셨나요?"
"아니요, 좋아는 하지만 많이 보지는 못했어요."
그렇다. 베짱이에겐 공연을 관람할 머니라는 양식이 없었다.
내 대답에 이어 한마디 하셨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와 우리의 대화는 끊겼다.
잠시 뒤 말을 이어갈 타이밍이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셨는지 궁금했지만 묻어두었다.
연기라는 영역이 내게 물인지 불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불확실성 때문에 인생의 절반을 그 밖에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예술은 재능을 타고난 이들의 소유물이라고 여겼다.
물인지 불인지 알 수 없는 영역을 쉽게 뛰어들 수는 없겠지만
물속에서는 내가 수영할 수 있고 불속이라면 내가 방화복을 입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로 했다.
내가 확신하는 건, 나의 사고는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