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고생해서 번 수당을 사령관이라는 직책 하나로 몽땅 빼앗아간 아가멤논의 갑질에 화가 날대로 난 아킬레스. 그의 자존심은 구겨졌고 그는 참전을 보이콧하기에 이르지만 그 정도로는 아케아 연합군에 그렇게 커다란 데미지를 기대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여신인 엄마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엄마 빽을 이용해 올림포스 최고의 신 제우스를 움직이고자 했습니다. 아가멤논이 작은 벤처회사 사장 급이라면 제우스는 삼성 같은 재벌 회장급이니까요. 아킬레스는 아래와 같이 엄마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지금 제우스 곁에 앉으세요, 그의 무릎을 두 손으로 꼭 잡으세요. 그리고 상기시키세요.
할 수 있으면 트로이를 돕도록 그를 설득하세요. 아케아군을 그들의 배로 쫓으세요. 그들을
바다를 등지게 몰아서 도륙하게 하세요. 그 길이 그들의 왕을 감사하게끔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 길이 아테어스의 아들인 아가멤논이 아케아 연합군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을
모욕한 그가 얼마나 바보였는지를 깨닫게 할 겁니다. ( 『일리아드』, 33)
아킬레스가 생각한 분노 해소 방법은 적군을 도와 아군을 치는 일입니다. 적(아가멤논)의 적(트로이)은 내편이란 논리이지요. 아들의 간청을 들은 티티스. 지체없이 올림포스 산으로 올라가 제우스를 만나선 다음과 같이 간청을 합니다.
제우스 아버지시여. 여러 신들 중에서 제가 말로나 행동으로나 당신을 잘 섬겼지 않나요.
제발 제 청을 들어주셔서 제 아들에 대한 당신의 총애를 보여주소서. 그는 이미 일찍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어요. 근데 인간의 왕인 아가멤논이 그를 모욕했어요. 그는 제 아들의
전리품을 빼앗아 자신이 가졌지요. 나의 아들의 원한을 갚아주소서. 최고 판사이시여. 그리고
트로이군이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하소서. 아케아군이 제 아들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충분히 보상을 할 때까지 말입니다. ( 『일리아드』, 36)
제우스는 아케아 연합군의 편을 들고 있는 자신의 아내 헤라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중립을 지키는 척했지만 티티스의 간청을 들은 직후 트로이 군을 돕기로 맘을 먹습니다. 티티스의 요청은 그동안 거의 10년간 유지해왔던 아케아군과 트로이군이 벌인 싸움의 균형이 깨짐을 의미합니다. 균형이 바로 신들에 의해 유지되었기 때문이죠. 애초 황금사과를 빼앗긴 헤라와 아테네는 파리스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 두 여신은 아케아 편이었죠. 반면 헬렌을 선물하고 사과를 얻은 아프로디테는 자연히 파리스의 편이었습니다. 여기에 제우스의 마음은 사실 은근히 트로이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우스는 이제 전면에 나서서 트로이를 돕고자 맘먹습니다.
아가멤논과 싸운 후 아킬레스가 출전을 거부하고 제우스가 트로이 편을 들자 전세는 단숨에 역전이 됩니다. 이역만리 배타고 싸우러 와선 헬렌을 되찾긴 커녕 깡통차고 돌아가게 생긴 아케아 연합군. 다시 참모 회의가 소집됩니다. 참모들은 한결같이 사령관에게 우리가 이처럼 수세에 몰린 건 바로 당신이 아킬레스의 배당금을 빼앗아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라고 직언을 합니다. 이에 아가멤논은 다음과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존경하는 왕이시여! 내 역대급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당신의 설명은 전부 진실이요. 눈이
멀었었다는 사실 부인하지 않겠소. 제우스가 아케아 군들을 박살낼 정도로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킬레스는 군대의 가치가 있소. 내가 후회스럽게도 충동적으로 이 바보같은 일을
저질렀으니 제대로 보상해주어서 그를 달래고 싶소. ( 『일리아드』, 164)
늦었지만 아가멤논은 상왕으로서의 자존심 보다 실리를 택하기로 결심합니다. 다 죽게 생겼는데 자존심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스스로의 잘못을 모든 참모들 앞에서 쿨하게 시인하고 아킬레스의 분노를 풀어줄 선물 목록을 발표합니다.
1. 신상 가마솥 받침용 삼각대 7 개
2. 금 400 kg
3. 반짝 거리는 청동 가마솥 20 개
4. 힘 쎈 경주마 12 필
5. 털끝하나 안건들인 손재주 좋은 여자 7 명.
이 선물은 당장 주고 트로이를 함락시킬시 추가 다음과 같은 보너스를 지급하겠음.
1. 아킬레스가 맘에 드는 여자 20 명 추가 지급.
2. 고향으로 돌아가면 내 사위로 삼겠음. (딸 세 명 중 아무나 선택해도 OK)
3. 결혼 시 처가에 대한 선물은 면제. 오히려 내가 지참금을 넉넉하게 챙겨주겠음.
4. 내 왕국 중 가장 비옥하고 번성한 일곱 도시를 하사하겠음. ( 『일리아드』, 164)
그리곤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가 염라대왕을 싫어하는 이유가 뭔가? 그가 견고하고 타협을 싫어하기 때문 아닌가? 게다가 나는 나이로나 계급으로나 그의 위가 아닌가?
모든 참모들을 모두 아가멤논에게 환호를 했습니다. 그들은 이정도의 선물이면 아킬레스의 맘을 다시 얻으리라고 생각하곤 서둘러 아킬레스 막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킬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난 생각 따로 말 따로 하는 사람 싫어해요. 아가멤논 왕이든 나머지 아케아 사람이든
나를 설득시키지 못할 거요. 밤이나 낮이나 적과 싸운 대가로 고맙다는 소리 한번 들어보지
못했소. 집에서 빈둥거리나 전쟁터에서 잘 싸우나 몫은 똑 같았소. 겁쟁이나 용감한 사람이나
똑같이 존경받았소. 피똥 싼 놈이나 뺀질거린 놈이나 죽는 건 마찬가지요. 난 늘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대가는 다른 전사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소. ( 『일리아드』, 169)
자신은 여태까지 전사로서 공정하게 대접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여기까지 와서 개고생하는 이유를 생각하면 더 억울하다는 겁니다. 그는 아가멤논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준비한 선물 열 배 스무 배를 주어도 대답은 같다고 핏대를 올립니다. 물론 사위가 될 생각도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가 원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입니다. 즉 진정으로 나를 원하면 내가 겪은 그 모욕을 그도 똑 같이 겪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그의 거절 의 변 마지막은 전사로서의 명예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신이신 나의 어머님 은빛 발의 테티스는 운명이 내게 저승가는 두 가지 길을 예비해놓았다고
말했소. 내가 여기 남아서 트로이를 포위하는데 내 몫을 한다면 영원한 명예를 얻지만 귀향은
없다 하셨소. 그러나 고향을 간다면 난 일찍 죽는 일을 면제받아 오래 살지만 내 이름은 사라질
거요. ( 『일리아드』, 172)
선물을 받고 화해를 한다면 자존심을 지키겠으나 전사로서의 자신의 명예는 사라진다는 말은 앞으로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킬레스는 명예보다 자존심을 택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찾아온 원로들에게 당신들이 나 없이 트로이를 정복하는 일은 이미 글렀으니 고향으로 빨리 돌아가기를 바란다며 조금도 자신의 뜻을 굽히질 않지요.
아킬레스를 찾아온 참모들은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이들은 아케아 군 최고의 지략가이자 명확한 논리와 수사로 무장한 웅변가들이었습니다. 피닉스는 아킬레스 아버지인 펠리우스와의 친분을 거론하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 애씁니다. 과거의 귀족들이 순간적으로 열 받았다가 선물 받고 맘이 풀어진 예까지 동원하며 달래기도 하고 여자 한 명 때문에 이 사단을 만드냐고 협박도 해봅니다. 또한 사기가 바닥난 아케아 군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하며 전쟁터로 돌아오기만 하면 넌 신처럼 칭송받고 영광을 한 몸에 받으리라고 설득하지만 계란으로 바위 깨기에 불과 했습니다. 아킬레스는 아직도 아가멤논에게 받은 공개 모욕을 떠 올리며 씩씩 거리고 있었습니다.
명예인가? 자존심인가? 아킬레스도 이미 답을 압니다. 전사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곳은 전쟁터뿐 임을. 그러나 그 명예를 택하기에는 아직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호메로스는 묻습니다. 전쟁 중 상관으로부터 받은 인격적 모욕으로 인한 자존심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가 말이죠. 똑 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을 모욕해야 풀리는 건가요? 그의 자존심은 같은 편의 목숨보다 중한 것일까요? 전사의 명예보다 더 가치 있는 걸까요? 분노는 아킬레스의 눈과 귀를 막고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며 서서히 그를 삼키기 시작합니다. 같은 분노 조절의 실패라 해도 보통사람과 리더의 차이는 실로 엄청납니다. 리더는 보통사람이 가질 수 없는 리더급 인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킬레스는 올림포스의 제왕 제우스마저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태생적 배경이 있습니다. 자신의 분풀이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옵션이 보통사람들보다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힘을 가진 자의 분노를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리더의 분노는 이제 칼과 화살이 되어 아군을 추풍낙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