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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꼭또 Dec 31. 2023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 나를 찾는 명상의 길

  

     우리에게 근심, 공포, 분노를 잘 받아드리도록 도움을 주는  명상은 대단한 치유의 힘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자연적인 치유력이 일을 도록 해야 한다. (틱낫한)   



   낭만주의 영시 중에 명상시가 있습니다. 명상시의 특징은 모두 삼단계 형식(장소, 분석, 대화)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구조는 루이스 마츠가 그의 저서 『명상시: 17세기 영국의 종교문학에 대한 연구』에서 밝힌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거나 감사하는 종교시 혹은 헌신시의 형식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즉 명상시는 1) 항상 특정한 “장소”에서 시작하며 2) 그 장소의 특수성에 대한 시인의 “분석”으로 이어지며 3) 분석을 통한 결과나 깨달음을 “대화” 형식으로 토로하면서 끝을 맺는다는 겁니다. 이러한 명상의 과정을 정제되고 함축된 시어로 재현한 결과가 바로 명상시입니다. 명상시의 최종 목적지는 모든 명상이 그렇듯 (하나님의 은혜, 자연의 신비, 혹은 무아 등 무엇을 명상하든) 깨달음으로 얻는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자유입니다.   



   오늘은 예이츠가 쓴 많은 명상시 중의 하나인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를 읽어보겠습니다. 2023년을 보내면서 특히 연식 증가로 심적으로 불편하시다면 이 명상시가 조금이나마 위로를 드리지 않을까 희망해 봅니다.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의 첫 연을 읽어봅니다.   



저 곳은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젊은이들은

서로의 팔에 안겨,  새들은 나무위에서,

--죽어가는 저 세대들— 자신들의 노래를 부른다,

연어 폭포, 고등어가 우글대는 바다

물고기, 살, 새들이 여름 내내

모두 잉태되고 태어나 죽는 건 무엇이든 찬양한다

관능적인 음악에 취해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무시한다  



영국 명상시의 전통에 따라 장소(“저 곳”)에서 시작합니다. “저 곳”은 시인의 마음이 그 장소에서 이미 떠났음을 의미합니다. “저 곳”(아일랜드)은 환갑이 된 시인을 분노하게 만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나라 전체가 오로지 향락과  관능에만 몰두합니다. 젊은이들은 서로 껴안고 있고  깊은 바다 속 (“고등어”)부터 강물 위(“연어 폭포”) 땅 위 (“살” 짐승) 하늘 (“새”)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오로지 쾌락 혹은 번식을 위한 육체적 교류에만 진심입니다. 게다가 지들도 곧 늙어갈 것(“죽어가는 저 세대들”)들이 “영원한 지성의 기념비”를 세운 노인을 무시하니 화가 치밉니다. 그러나 예이츠의 분노 아래에는 인간 고통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이 존재합니다. 바로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이중성, 이원성(duality)의 문제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첫 연을 다시 읽으면 시인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의 시어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줄은 “노인”과 “젊은이들”, 남자와 여자 (“서로의 팔에 안겨”), 그리고 상과 하(나무 위의 새와 바다 밑에 서식하는 고등어)가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셋째 줄의 “죽어가는” 은 여섯째 줄의 “태어나”와  “찬양한다“는 ”무시한다“ 와 라임을 이루고 그리고 일곱째 줄의 ”관능“은 마지막 줄의 ”지성“과 한 쌍을 이룹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고통은 첫 연 전체에 암시되어 있는 이원적 사고(순간과 영원, 육체와 정신, 주체와 객체, 생과 사)에 기인한다는 겁니다. 이 이원적 의식은 우리에게 커다란 장애이자 한계이며 이 의식에 갇혀있는 한 인간은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첫 연에서 말하는 ”저 곳“은 아일랜드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연을 읽어보겠습니다.     


늙은이란 하찮은 것

막대기에 누더기 코트를 걸쳐놓은 허수아비일 뿐이리라

영혼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더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모든 누더기는 육신의 옷을 입고 있으니  

그 곳은 노래를 배우는 학교도 없으니   

자신의 장엄함의 기념비는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으로 왔다.  



명상시의 두 번째 단계는 첫 연에서 제시된 문제점 해결을 위한 분석(analysis)단계입니다. 시인의 결론은 자신이 유일하게 잘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자신의 영혼을 바친 시를 짓는 일입니다. “영혼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 더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진짜 허수아비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의 시에 대해 배울 학교를 찾아야 합니다. 아일랜드(혹은 이 세상)는 영혼의 유산인 시를 무시하기(“그 곳은 노래를 배우는 학교도 없으니”)때문입니다. 그가 선택한 학교는 그리스의 식민지 비잔티움입니다. 시인에게 비잔티움(오늘날의 이스탄불)은 장엄하고 영원한 예술의 세계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서로 다른 두 세계인 동양과 서양이 만나 하나가 되는 장소입니다. 첫 연에서 제시한 서로 충돌되는 가치가 하나로 통합되는 공간입니다.  시인은 명상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비잔티움으로 안내합니다. 그의 영혼은 몸에서 분리되어 자신이 꿈꾸는 예술가의 유토피아, 둘로 분열된 의식을 치유할 수 있는 통합의 상징 비잔티움에 도착합니다.

  


 이제 시의 결론 부분인 세 번째, 네 번째 연을 읽어봅니다.    


벽의 황금모자이크 그림 안에 있는 듯한  

신의 성스러운 불에 서있는 성현들이여

빙빙도는 원에서 돌면서 나오소서   

그리고 내 영혼의 스승이 되어주소서

죽어가는 동물에 매달려있는

욕정에 병든 내 심장을 태워주소서  

그것은 그게 무엇인지 모르니; 그리고

나를 영원한 예술품에 포함 시켜주소서     


자연에서 벗어난다면 나는 결코

나의 육신을 어떤 자연에서도 취하지 않으리니

오직 그리스의 금세공인들이   

황금유약을 바르고 금을 두들겨 만든

그런 형태를 취해

졸고 있는 황제를 깨우거나 혹은

혹은 황금가지위에 앉아 비잔티움의 귀족과 귀부인들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노래를 부르리.   



명상시의 마지막 단계인 대화(colloquy)입니다. 세 번째 연의 대화는 불 위에 서 있는 성현에게 부탁하는 시인의 기도이자 호소입니다. 시인은 먼저 불속의 성현들에게 “빙빙도는 원에서 돌면서” 나오기를 호소합니다. 이 원의 형상은 통일성 혹은 단일성 (unity or oneness)의 상징입니다. 서로 대립의 개념인 동 과 서가 만나 통합을 이룬 비잔티움의 공간적 상징성이 시각적으로 반복됩니다. 첫 연에서 제시한 이원적인 세계에서 둘로 분열된 의식을 치유할 상징적 처방전같이 느껴집니다. 시인의 명상이 의식의 통일성을 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속에 남아 있는 불순물(“욕정에 병든 내 심장”)을 불로 태워달라고 호소합니다. 시인은 순수하고 영원한 예술품으로의 재탄생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연의 대화는 자신과의 대화이자 호소입니다. 시인은 불멸의 황금새로 재탄생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노래(영원한 생명의 시)를 부르겠다고 염원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향해 외치는 시인의 호소는 그의 깨달음입니다.    


   예이츠가 비잔티움을 찾는 과정은 분노와 고통을 자신의 유토피아로 대체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명상시라고 부르는 이 정신적인 여정은 틱낫한 스님의 말씀처럼 정신적 힐링 프로세스입니다. 근심, 걱정, 분노가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의 몸은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찹니다. 바로 명상이 필요할 때입니다. 먼저 우리는 문제를 (문제에서 벗어나) 멀리서 바라보면서 조용히 명상해야 합니다. 이때 문제는 예이츠의 표현을 빌면 바로 “저 곳”이 되는 겁니다. 또한 예이츠가 말한대로 우리를 구원해줄 사람은 우리뿐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를 예이츠는 우리 자신의 기념비를 스스로 세워야 한다고 표현 합니다. 우리는 그 기념비를 위해 영혼을 다해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영혼의 손뼉을 치며 기타치고 섹스폰 불고 장구치며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요리, 독서, 운동, 여행 등 자신이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무엇이든 우리의 유토피아이며 가나안입니다. 그 유토피아는 우리 마음의 불순물을 정화시키는 시간이자 공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이츠처럼 불별의 노래는 못 만들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나만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새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올 근심, 걱정, 분노. 그러나 자신만의 유토피아만 있다면 노 프라블럼입니다. 새해에는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건승하시기를 드립니다.          



P/S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의 원문을 첨부합니다.



Sailing to Byzantium


BY WILLIAM BUTLER YEATS


I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The young

In one another's arms, birds in the trees,

—Those dying generations—at their song,

The salmon-falls, the mackerel-crowded seas,

Fish, flesh, or fowl, commend all summer long

Whatever is begotten, born, and dies.

Caught in that sensual music all neglect

Monuments of unageing intellect.



II


An aged man is but a paltry thing,

A tattered coat upon a stick, unless

Soul clap its hands and sing, and louder sing

For every tatter in its mortal dress,

Nor is there singing school but studying

Monuments of its own magnificence;

And therefore I have sailed the seas and come

To the holy city of Byzantium.



III


O sages standing in God's holy fire

As in the gold mosaic of a wall,

Come from the holy fire, perne in a gyre,

And be the singing-masters of my soul.

Consume my heart away; sick with desire

And fastened to a dying animal

It knows not what it is; and gather me

Into the artifice of eternity.



IV


Once out of nature I shall never take

My bodily form from any natural thing,

But such a form as Grecian goldsmiths make

Of hammered gold and gold enamelling

To keep a drowsy Emperor awake;

Or set upon a golden bough to sing

To lords and ladies of Byzantium

Of what is past, or passing, or to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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