펴보니 아름답더라
하얀 도화지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새하얗기도 하고, 꽤나 커다란 도화지 같았다. 내 어릴적 인생은 말이다. 사랑도 잔뜩 받고, 공부도 나쁘지 않게 하고, 아이의 눈에는 앞으로 펼쳐질 자기의 인생이 탄탄대로 같기만 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내 인생의 도화지가 물들지도 구겨지지도 않은 채로 잘 유지되기를 바라며, 크고 하아얀 도화지로 남기를 바라며 보살피려 했다.
11살, 하나 뿐인 내 동생이 장애 판정을 받았다. 내 도화지가 한번 구겨졌다. '그래도 언젠가는 치료돼서 다른 아이들처럼 되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내 도화지를 펴댔다.
13살, 친구에게 맞아서 얼굴에 큰 흉터가 났다. 다시 한 번 나의 도화지가 구겨졌다. 친구를 용서했다. 용서하는 내 모습이 참 마음에 들엇다. 다시 한 번 나의 도화지를 열심히 다림질했다.
14살, 국제중학교에 들어갔다. 내 하얗고 커다란 도화지가 드디어 빛을 발할 줄만 알았다.
근데, 거기엔 나보다 훨신 하얗고 커다란 도화지가 잔뜩이었다.
내 도화지는 매일 구겨지고, 이상한 물감이 잔뜩 뿌려졌다. 나는 내 도화지를 펴고 또 폈고, 물감을 지우고 또 지워댔다.
20살이 되던 해, 졸업식을 마친 나의 손에 들려 있는 도화지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희고 커다랗게 보였다. 이제는 진짜 내 도화지를 뽐낼 시간인줄로만 알았다.
그치만, 스무살의 나에게 세상은 여전히 거친 곳이었다. 내 도화지는 여전히 구겨졌다. 이상한 색깔의 물감도 막 뿌려졌다. 펴보려도, 지우려도 했지만, 힘에 부쳤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펴봐도, 열심히 지워봐도 금새 내 도화지는 구겨지고 물들었다.
그냥 놔뒀다. 더 이상 구겨진걸 펼 힘도, 더러운 물감을 지울 힘도 없었다.
내 구겨진 도화지를 바라봤다. 너무 더러웠다. 너무 커서 한 눈에 들어오질 않았던 도화지는 초라하게 이상한 모양으로 내 앞에 놓여져 있었고, 내가 원치도 않았던 이상한 색깔의 물감으로 잔뜩 칠해져 있었다. 슬펐다. 눈물이 났다. 진짜 예쁘게 보살피려 했다. 마지막에는 정말 예쁜 그림도 그리려 했는데. 이제는 그림 그릴 자리도 없고, 그냥 구겨진 쓰레기 같아 보였다.
그렇게 5년, 내 도화지를 방치했다. 그러는 동안 더 구겨지고, 물들었다.
그러고 5년이 지나고. 난 내 도화지를 다시 펴보기로 했다. 도화지를 펴는건 쉬는 일만은 아니었다. 심리 상담도 받아보고, 학교 공부도 더 열심히 해보았다.
자존감. 이 망할 놈을 다시 피는건 정말 힘들었다. 나조차도 기대하지 않는 나에게 누군가의 기대를 바라기란 쉽지 않았다.
상담을 6개월을 받았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꼬깃꼬깃했던 내 도화지가 조금씩 펴져가는게 보였다. 억지로 피려 하진 않았다. 다만, 꽃봉오리가 조금씩 펴지며 활짝 핀 꽃이 되듯, 그저 옆에서 내 도화지가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지길 바라며 노력했을 뿐이다.
꽃은 핀다. 내 도화지도 그렇게 드디어 펴졌다. 구겨졌던 자국이 가득. 못난 물감 자국도 가득. 더 이상 하얗고 깨끗하지 않다.
다시 내 도화지를 본다. 구겨진 자국들은 예쁜 주름이 되어 있었다. 망할 물감 자국들은 사실 예쁜 그림이었다. 그 누구도 흉내 못내는 한폭의 그림이 되어있다.
이제 나는 흰 도화지를 찾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