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여라
“마음은 그릇이고, 사랑은 그 안에 담긴 물이다.”
“마음에 사랑이 가득 차야, 그제야 내 사랑은 넘쳐흘러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채울 수 있다.”
신부님과 소주 한 잔 나누던 그날,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내 마음을 울린 말이다.
"일단 너 자신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신부님의 마음 어린 조언이었다.
이 글은 종교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종교가 언급된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글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종교’보다 중요한 건
그 속에서 위로를 얻었던 ‘나’의 경험에 있다.
결국 나는 이 글을 통해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랑을 받는 것은 늘 좋았다.
가장 어린 기억을 떠올려보면,
다섯 살의 내 마음은
언제나 할머니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따뜻한 품속에 안겨 잠들던 그날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시절 나는
사랑받았고,
사랑받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좋아했다.
가족들 앞에서 춤추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며
주변의 관심을 사랑처럼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채워갔다.
삐걱거림은
중학생 무렵부터 시작됐다.
어린 시절의 특별함만으로는
더 이상 내가 원하는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타인의 관심으로 마음을 채우려 들었고,
남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비교는
마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나보다 못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보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었고,
반대로 나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다.
결국,
내 마음의 그릇엔 사랑이 남지 않았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괴롭지만,
스스로에게 주었다 뺐는 사랑만큼 고통스러운 건 없었다.
2018년, 스물한 살.
반수에 실패하고
다시 원래 학교로 돌아간 나는
롤러코스터의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인의 시선으로 사랑을 채우고,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재단해온 지난 10년의
처참한 결과였다.
그때,
내게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건 종교였다.
어느 날,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다가
문득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건 그저 종교적 감정이 아니었다.
나조차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던 그 시기에,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꼈던 순간이었다.
어릴 적 내게는
그 존재가 할머니였고,
스물한 살의 나에겐
예수였다.
그날 이후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말을 마음 깊숙한 곳에
하나의 기둥처럼 박아두었다.
물론,
내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매일,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하려 애쓰는 연습을 했다.
그 연습에
꼭 5년이 걸렸다.
2024년, 스물일곱.
지금의 내 마음은
이제 사랑이 넘쳐흐른다.
넘쳐서 다른 사람들을 채우고 나서도
내 마음 속에는
사랑이 계속해서 차오른다.
나는 믿는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을 채워주는 사랑의 ‘원천’이 있다고.
그게 누구든, 어떤 것이든.
나에게 그 원천은
‘예수’라는 형태로 다가왔을 뿐이다.
누군가에겐
부모님일 수도 있고,
연인이거나,
부처님이거나,
자연의 위대함일 수도 있다.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 순간,
사랑의 원천은
세상 어딘가에 있는 무언가에서
'나 자신’으로 옮겨온다.
그때 비로소
당신의 마음에도
조용히 사랑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