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쿠키몬스터 Nov 08. 2021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방 문을 닫고 왼쪽으로 90도 돌아서자마자 나타나는 첫 계단에서부터 왼발을 딛으며 걷기 시작하면, 가게까지 정확히 523걸음이었다. 사실 522걸음이면 충분하지만 첫 발을 왼발로 딛었으니 마지막 발은 오른발로 마치기 위해 제자리에서 한걸음 더 걸어 균형을 맞추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정확히 523걸음을 걸은 후 사과 상자 앞에 설 수 있었다.



정확히 477걸음 걸었을 때 그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앞으로 벌어질 많은 이상한 일들의 시작이라는 것을 예측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에게 바로 다음에 일어날 불행을 예측하기에는 충분한. 그 정도의 갑작스러운 이벤트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 끔찍한 일은 매우 사소한 오차로부터 시작되었다. 어제 밤이 평소보다 조금 더웠기 때문에 ㄴ씨가 잠을 이루지 못했고, 매일아침 ㄴ씨의 달그락 소리에 잠을 깨던 ㄹ씨가 제 시간에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한 이유로 지각의 위기에 처한 ㄹ씨가 평소와 달리 그 큰 배를 열정적으로 흔들며 뛰쳐나간 덕분에 셔츠의 연약한 단추 하나가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를 쟁취했으며, 방금 자유를 얻은 단추에게는 슬픈 소식이지만 우연히 반짝이는 단추를 목격한 까마귀가 평소라면 절대 내려오지 않았을 차가운 돌바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명 그것이 새로 만든 둥지를 꾸미기에 가장 완벽하고 품위 있는 장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의 거리 생활로 사냥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만큼 연륜있는 굶주린 고양이 한마리가 욕심 많은 까마귀를 쫒아 그의 앞을 쏜살같이 달려갔고, 놀란 그는 발을 헛디뎠다. 그 덕에 그는 정확히 두 걸음을 낭비했고, 바로 지금의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두 걸음이 부족하다. 오른발로 마무리 할 마지막 한 걸음을 빼고 두 걸음이 부족하다. 그러니 총 세 걸음이 부족한 것이다. 이미 520걸음을 걸어왔기 때문에 오른발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남은 두 걸음을 평소 보폭의 세배로 걸어야 했다. 평소의 보폭의 두 배 만큼 세 걸음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끔찍한 상황에서도 오른발로 마무리 하는 것만은 지켜내야겠다는 것이 그의 고집이었다.



오늘이 생에 최악의 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뱃 속 깊은 곳으로부터 꿀럭꿀럭 올라왔다 순식간에 목까지 차오른 끈적한 불안감에 그는 숨이 막혔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주름진 미간을 찌뿌리고 핏줄이 솟아오른 마른 손으로 소름이 돋아 빳빳해진 양팔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불쾌한 경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확히 평소 보폭의 세 배 만큼 발을 디디기 위한 심호흡을 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한쪽 발을 들자마자 그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매일 그래왔던 것처럼 522걸음을 왼발로 딛고 제자리에서 오른발로 한 발짝 걸어 523걸음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은 평소의 세배 보폭의 두 걸음을 오른발로 시작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왼발을 들고 서 있었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왼발로 걸음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방문을 닫고 왼쪽으로 90도 돌아서자마자 보이는 계단을 딛었던 첫 걸음도, 그 전날의 거리로 나서기 위한 첫 걸음도, 4년 2개월 전의 하루를 시작하던 첫 걸음도 왼발로 시작했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어떤 시간, 어떤 평행우주의 어떤 공간에 있는 그라도 첫 걸음을 왼발로 시작했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완벽한 습관이 그를 망쳐버렸다. 이대로라면 523걸음을 오른발로 마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그는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무거워진 심장이 쿵 쿵 쿵 뼈마디마디를 부수며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왼발을 든 채로 멈추어버렸다. 한 줄기 땀방울만이 앙상한 그의 뒷목을 타고 다급하게 낡은 셔츠 속으로 사라졌다.



ㄴ씨가 다시 정시에 잠들고, 고된 하루를 보낸 ㄹ씨가 새 셔츠를 다리면서 흥얼거리고, 주인을 잃은 새 둥지가 쓸쓸히 식어가고, 이제는 더 이상 배고프지 않은 고양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앞발을 핥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시간이 멈추어버렸다.



어쩌면 다른 골목으로 돌아 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일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항상 걷는 그 길이 그의 계산으로 얻어낸 최적의 경로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길만이 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경로를 시도하는 일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더 이르거나 늦은 시간에 방문을 나설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일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항상 나가는 시간 또한 그의 계산으로 얻어낸 최적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더 이른 시간에 나갔다면 수다스러운 우유 배달원과 마주치게 될 것이고, 더 늦은 시간에 나간다면 분주한 출근길을 걷거나 뛰는 산만한 사람들과 동선이 겹치게 될 것이다. 그런 일들 또한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마주친 이 상황은 지금까지 그려왔던 수많은 끔찍한 상상보다 더 큰 재난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하자 그는 힘없이 털퍽 주저앉아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며 웃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을 버텨온 늙은 돌더미가 마침내 얇은 바람에 무너지며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묵은 비명 같았다.

작가의 이전글 '스쳤다' 현상에 대한 고찰 [짝사랑 실험보고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