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를 대자면, 핸드폰이 생긴 이후로 힘써 무언가를 기억하려 애쓰지 않았다.
물론 세월이 흐른 탓도 있겠지만 기억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음을 일상의 소소한 사건 속에서 끊임없이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의 마음은?
가끔은 뇌가 있는 것인가 스스로 자책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며,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는 거라며 셀프 위로를 하기도 하고, 여하튼 혼자서 오만가지 생각을 지지고 볶는다.
어제 아침에도 달걀 프라이를 하려고 달걀을 씻어서 행주에 물기를 닦으려고 싸놨다가 그걸 잊고 행주를 급하게 들다가 달걀이 모두 깨져버렸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데서 나의 자괴감은 컸다.
그리고 스스로 자각할 틈도 없이 아침부터 일진이 안 좋다고 생각해 버렸다.
보통 그릇을 깨뜨리거나 하는 행동을 하면 일진이 사납다는 식으로 하루를 점치게 된다.
이것은 종교와 상관없이 문화적으로 내재된 사고방식으로, 스스로 통제하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에너지를 모아 그날의 일들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해석하게 한다.
사실 이런 일들은 살다가 수없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인데도 어떤 날은 이런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나는 아침부터 일진이 안 좋다,라는 생각이 들자 이건 일진이 안 좋은 게 아니라 온전히 나의 실수일 뿐이라며 애써 불운의 생각을 덮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가 잘 마무리되나 싶었을 때 몇 가지 일이 있었다.
지인에게 부탁한 물건을 찾으러 가는 길에 좁은 통로에서 자리를 비키지 않고 서 있는 차량을 피하다 운전석부터 뒷좌석까지 문에 스크래치가 생겼다.
보통은 움직이지 않고 상대방이 비킬 때까지 기다리는데 나는 맘이 살짝 급했다.
게다가 차로 5분 거리인 지인의 집까지 왕복 한 시간이 걸렸고 주문한 물건은 원하는 대로 오지 않았다.
그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침에 깨뜨린 달걀의 비린내 맡았다.
나의 뇌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일진이 사납다’는 통속적인 생각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스크래치는 내 실수이고, 지인의 주문 실수는 실수축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약간의 번거로움만 감당하면 되는 수준인 데다, 교통체증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해결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쉽지 않더라도 받아들이려는 겸허와 평정심이 필요하다.
라이홀더 니버의 평정을 구하는 기도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기도를 하는 것이 매일의 삶의 과제이다.
오늘 내가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내 마음가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