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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 우화 Oct 27. 2024

배추 된장국

한 달에 한 번 난 호르몬에 습격당한 채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오물 같은 짜증을 가족들에게 쏟아내게 된다. 오물을 뒤집어쓴 가족들의 감정도 덩달아 더러워진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다이어리에 ‘지랄 주의보’라고 써놓으며 자신에게 경고장을 날려보아도 욱하는 성질머리는 어느 포인트에서 터질지 모를 지뢰처럼 손써볼 틈도 없이 터져버리고 만다.


남편은 이런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기 때문에 내 목소리 톤이 미세하게 높아지고 미간이 꿈틀대면 아이들에게 엄마를 조심하라며 주의를 준다. ‘맹견 주의’라고 써 붙여야 할 정도로 누구 하나 걸리면 물어뜯을 기세다.


그날은 마치 폭풍 전야처럼 기분이 푹 가라앉아 있었다. 입맛도 없고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먹여야 하니 꾸역꾸역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저녁 식사로 배추된장국을 끓이고 있는데 남편이 퇴근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은 내가 감정을 있는 대로 표출할 때는 무시를 하거나 기피하는 내색이 역력하지만 오히려 무표정에 굳게 다문 입을 보면 되레 안절부절못하고 주위를 서성이며 수작을 건다. 그리고 그럴 때는 의례 도와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엌을 어슬렁거리며 된장국을 끓이는 나에게 아는 척을 한다. “뭐 끓여? 짬뽕 만드는 거야? 와~ 맛있겠다.” 순간 남편은 내 눈에서 나오는 강렬한 레이저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며 자신이 대단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눈을 흘기며 “이게 무슨 짬뽕이야? 짬뽕을 지금 왜 끓여? 나가~.”라며 나의 요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에게 짜증을 낸다. 그는 곧 머쓱해져서 부엌에서 나간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게 어디 봐서 짬뽕이냐고, 딱 봐도 된장국이구만.. 남편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고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정말 짬뽕 같은지 고개를 쏙 빼고 된장국을 들여다보는데 아무리 잘못 봐도 짬뽕은 아닌 데 말이다. 그렇다면 냄새는? 한국에서 가져온 집된장 냄새가 구수하니 코가 이상하지 않고서야 짬뽕이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였다. 급하게 된장을 조금 더 풀어본다.


상을 차리는데 나는 반찬을 담고 남편은 국을 뜨고 있는데 딸이 “아빠 이거 뭐야?”라고 물으니 남편이 내 귀에 들릴 만큼의 작은 소리로 “응, 청국장인가 봐..” 나는 못 들은 척한다. 정말 딱 봐도, 냄새만 맡아도 된장국인데 왜 남편은 자꾸 엉뚱한 소리만 하는지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도 나서 어금니를 물었다.


드디어 식탁에 앉아 국을 한술 떠서 먹는 남편이 그제야 “아, 배추 된장국이구나. 맛있다.”라며 내 눈치를 본다. 모른 척 끓어오르는 화를 배추 된장국으로 누른다. 살며시 아이들에게 “국 맛있어?”하며 확인을 하니 먹을만한지 고개를 끄덕인다. 남편이 하도 헛소리를 해대서 자신감이 없었는데 그래도 끝까지 다 먹는 것을 보니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며칠 후 정상 호르몬을 되찾은 나는 이 날 일이 떠올라 혼자 실소를 했다. 그날부터 하루는 빨간 국물에 해물이 잔뜩 들어간 짬뽕을, 다음 날은 한국에서 가져와 얼려두었던 청국장을 꺼내 김치 조금과 두부를 듬뿍 넣어 청국장을 끓여주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은 메뉴가 무엇인지 묻거나 확인하지 않고 무조건 ‘맛있겠다.’라는 말만 남발하였다. 그새 상당히 지혜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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