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전기
휴대폰 알람 소리에 손을 더듬어 전화기를 찾아 알람을 끄고 보니 와이파이 대신에 3G가 떴다.
전기가 나갔음을 직감하고 일어나 밖을 확인하니 역시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만져보니 전기가 나간 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도시락을 싸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냉장고문을 열어야 했으므로 머릿속으로 어느 구간에서 어떤 재료를 빼야 할지 빠르게 정리한 후 잽싸게 필요한 것들을 꺼냈다.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려던 계획을 변경해 성냥을 켜 압력 밥솥을 가스불에 올리고 또 다른 화구에 프라이팬을 올렸다.
보통은 부엌에 들어오자마자 전기포트의 스위치를 올리는데 오늘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으니 반찬 하나를 완성한 후 프라이팬이 있던 화구에 끓일 물을 올렸다.
옆 컴파운드 가로등이 나눠주는 불빛에 의지하여 사과를 깎고 아침 시간에 듣는 라디오를 오늘은 큰맘 먹고 크레딧을 사용하여 듣는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지. 암, 그렇고 말고..
시리얼을 종류대로 그릇에 담고 드라이드 코코넛칩과 각종 견과류에 바나나를 얹고 썰어놓았던 사과도 잘게 잘라 얹는다.
우유가 괜찮은지 먼저 마셔보고 합격을 준 다음 지난밤 삶아 놓았던 달걀을 반으로 갈라 소금과 후추를 조금 뿌려서 식탁을 차린다.
컵에 꿀과 홍삼을 덜어 찬물로 서서히 녹인 후 약불에서 끓이고 있던 따뜻한 물을 조금 넣어 준다.
압력솥의 추가 칙칙칙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 불을 줄이고 감으로 밥이 됐다 싶으면 불을 켠 채로 김을 뺀다.
압력솥에 밥을 짓는 날은 구수한 누룽지를 만날 수 있는 날이다.
갓 지은 밥을 도시락통에 담고 남은 밥을 빈 그릇에 옮겨 담은 후 가장 약불에서 노릇노릇 누룽지를 만든다.
기다림의 시간이다.
기다리면 찾아와 주는 아침 해는 어느새 주방을 밝혀주었고 할 일을 마친 나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아이들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아침부터 내가 대견스러워진다. 시작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