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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Jan 14. 2024

230929) 낙소스 3일, 산토리니 1일

 Naxos Port > Thira Santorini Port > oia


잠이 덜 깬 채로 누워 있던 아침.

이 아이가 우리 방의 창가를 다녀갔다. 이 사진이 이 핸드폰으로 찍은 첫 사진이다.




 


전날 마을에서 산 꿀과 과일, 호스트가 준 빵으로 아침식사.


갑자기 사진의 퀄리티가 확연히 달라진 건 여기서부터 내가 찍은 사진들이기 때문이다. 포토그래퍼 도아의 사진에 기생할 수 있었던 시간은 지나버렸다.







이 핸드폰의 카메라에는 화질이 좋지 않은 사진의 감성이 있다. (고 생각해본다.)


아침을 먹고 테라스를 내다보는 도아의 사진을 찍었는데 툰의 형광색 수영복이 걸린 건조대가 같이 찍혀서 감성을 와장창 깨버렸고… 그 수영복의 주인이 AI 지우개로 건조대를 지워주었다.


tmi: A14에는 AI 지우개가 없다.






이것저것 만져보며 새 핸드폰과 친해져보았다.





숙소 뒤편의 담벼락을 마지막으로 체크아웃.





항구에서 차를 반납했다.

페리를 탈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은 되지 않을 것 같아 간식을 먹으러 갔다.


그때 드디어 마음에 드는 에코백을 발견했다. 그리스 여행 7일차에 처음으로 찾아낸, 눈알이 없으면서도 크기도 적당하고 디자인도 괜찮은 에코백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날 새 핸드폰에 하필 은행 어플 인증을 해놓지 않은 탓에 트레블월렛 카드를 충전할 수가 없었다. 툰이 카드를 빌려주겠다고 했고, 마침 가게가 항구에 돌아가는 길에 있어서 페리를 타러 갈 때 사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이 길어진다는 건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Waffle House


젤라또를 얹은 와플이 유명한 와플하우스. 바닐라빈이 콕콕 박힌 와플하우스 맛이 시그니처인데, 제일 밍밍해보이지만 역시 시그니처는 시그니처였다.







페리를 타러 가기 전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와플하우스에 캐리어를 맡기고 잠깐 흩어져서 시내를 구경하다가 탑승 시간 15분 전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 에코백 가게에 가서 가방을 제대로 확인하고서는 편한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보냈다.

신발 가게에서 호객 행위하는 고양이도 보고.






첫날 제대로 못 봤던 시내를 둘러보았다.






AI 지우개가 없는 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찍어야만 한다.

그래도 이렇게 순간포착한 사진을 건질 땐 기분이 좋다.






예상치 못한 이유로 더 예상치 못한 기종의 핸드폰을 사서 슬펐는데 이 사진들을 건지며 기분이 나아졌다.






제법 사진이 잘 찍히잖아?

아니 피사체가 좋은 걸지도…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와플하우스 앞에서 동행인들을 만나 캐리어를 가지고 항구로 가는데 어쩐 일인지 시간이 1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희한하지, 15분은 넉넉해 보이는데 10분은 갑자기 촉박해 보이는 게…. 그래서 에코백을 포기하고 가자고 했지만 우리 마음 약한 INFJ 도아는 그런 에코백은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며 툰의 카드를 빌려가라고 했다. 먼저 항구로 가 있을 테니 사고 오라고. 나는 거기서 또 그래…? 그렇다면…! 하고 카드를 빌려서 달려갔다. 그러나 가게에서 그 카드가 결제에 계속 실패했다.


결국 구매를 포기하고 가게를 나와 페리를 타러 갔다. 진짜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도아와 툰도, 내가 타야할 페리도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커다란 페리에서는 승객이 쏟아져나오고 있어서 저게 내가 타야할 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도아에게 보이스톡을 걸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도아와 툰이 설명하는 위치를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시간은 계속 흘렀다. 나는 정말로 내가 페리를 놓치는 줄 알았다. 내 동행인들까지 나 때문에 페리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결론만 말하면 페리는 무사히 탔다. 승객이 쏟아져나오던 페리가 내가 타야 할 페리였고, 카드에는 잔액이 없어서 결제가 안 된 거였다. 에코백을 못 산 건 아쉽지만 페리를 놓칠 뻔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무사히 탔으니 편하게 앉아서 가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너무 힘들었다. 페리에 타고 나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시엔 한참 뛰어다니다가 한순간에 모든 긴장이 풀려서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낙소스에서 쌓였던 모든 일이 그때 터졌던 것 같다. 동행인과 사이가 틀어질 뻔하고 일정은 절반이 남았는데 핸드폰이 망가지고 S23은커녕 한국에 출시를 안 해서 삼성인데 삼성페이가 안 되는데다 팔릴지 안 팔릴지도 모르는 핸드폰을 필름값까지 30만원을 주고 사고… 그래도 이제 이곳을 떠나니까 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에코백 하나 사겠다고 페리를 못 탈 뻔하다니. 이때 에코백에 학을 떼어서 이후로는 그냥 마음을 놓았다. 그랬는데… 정말이지 여행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페리를 둘러보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이 페리가 그리스에서 탄 페리 중에 가장 예뻤다.






흔한 페리의 화장실 뷰.







전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잘 어울리는 국기 선정 (아님)





윗 사진을 찍고 돌아서서 찍었더니 아랫사진이 나왔다. 빛은 신기해.

엽서로 인화했을 때 아랫사진의 실물이 정말 예쁘게 나왔다.






바다는 내내 평온했다.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이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든 나는 여기에 있다는 걸 되새겼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들은 지나갔다. 그리고 이 배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주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산토리니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렌트를 예약했는데, 렌트카를 가져다 주는 직원이 파란 셔츠를 입고 선착장의 입구에서 도아의 이름이 적힌 카드를 들고 서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던 사람들의 수많은 종이에 도아의 이름은 없었다. 파란 셔츠만 보이면 카드를 유심히 보느라 파란 셔츠를 입은 남자와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제 카드를 들어보이며 이게 너야? 하고 눈으로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와 그는 서로 실망하며 상대방을 찾아헤맸다.


도아와 툰이 나에게 캐리어를 맡겨놓고 땡볕에서 기사를 찾아다녔다. 나는 아이고 고생하네… 하면서 가만히 서 있다가 냅다 여기로 돌진하는 버스를 피해서 세 개의 캐리어를 끌고 다녀야 했다. 여기로 피하면 다른 버스가 또 여기로 오고 저기로 피하면 저기로 오고… 보다 못한 어느 여성분이 같이 끌어다주었다. 고맙습니다.


어느덧 카드를 든 사람들과 하차객이 모두 짝을 만나 떠나고 항구에는 나와 세 개의 캐리어만 남아 있었다. 저 멀리까지 가서 헤매던 도아가 그 호스트에게 다시 연락했는데 그제야 웬 카페를 알려주며 거기에 있다고 했다. 그럼 처음부터 그 카페로 알려줬어야지.


그때 밝혀진 환장 포인트 세 가지.


렌트카 직원은 파란 셔츠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던 건 도아의 이름이 아니라 운전자인 툰의 이름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항구 쪽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카페에서 그늘 아래 서 있었다.


그러면 우리가 항구에서 어떻게 찾냐고!!!!!!!!!!!!!!!!!

다시 생각해도 열받아…


그와중에 차는 어디 멀리에 대 놓은 건지 운전자만 오라고 해서 툰이 갔는데 이미 신청할 때 다 적어서 냈던 걸 일일이 물어봐서 우리가 카톡으로 전부 얘기해줘야 했다. 그러다 답답해서 결국 도아도 거기까지 가고… 이럴 거면 신청할 때 왜 쓰라고 하는데? 근데 그건 크레타에서도 그랬다. 미리 예약을 해가도 스피드하게 차를 수령할 수 있다는 기대는 버리는 게 좋다. 그냥 차가 확보되어 있다는 안정감만 있을 뿐… 그럼 뭐해 다른 셔츠 입고 다른 사람 이름 들고 다른 곳에 서 있으면!!!!!!!!!!!!!!!!!!!!!! (다시 급발진)







그렇게 겨우 차를 빌리고 체크인을 하러 갔다. 숙소 근처에서 호스트를 만났는데, 호스트가 어떤 아저씨를 데리고 왔다. 이 아저씨가 짐 나르는 걸 도와줄 거라고 했다. 뭐 얼마나 힘들길래? 했는데 어머나 세상에. 내가 이 길을 캐리어를 들고 갔으면 난 그날 드러누웠다. 계단이 계단이 세상에.


그런데 조금 돌아오기는 하지만 훨씬 편한 길이 있는데 왜 그 수많은 계단을 올라간 건지 모르겠다. 그것도 캐리어를 들고. 자 이런 게 산토리니야 하고 체험시켜준 건가? 아직도 의문. 


사진은 숙소 앞에서 올려다본 뷰.







체크인하고 캐리어만 놓은 뒤에 바로 이아마을로 향했다. 






Roka


이아마을 최고 맛집으로 통하는 곳인데 점심 시간대가 살짝 지난 애매한 시간이어서인지 사람이 없었다.




 


도아가 전날에 버섯을 먹고 싶다고 했는데 마침 여기가 또 버섯 맛집이었다. 버섯 리조또와 '숲의 향기'라는 이름의 스타터(위쪽)를 시켰는데 뜻밖에도 이 스타터에 들어간 버섯이 너무 맛있었다. 


버섯 리조또도 맛있지만 리조또 소스에 버섯이 묻힐 수밖에 없는데, 스타터는 버섯의 맛이 온전히 느껴졌다. 거기에 그리스의 올리브 오일이 뿌려지니 천국이 아닐 리가.



 


행복.

그릇 위에 한 입 베어먹은 저거는 에피타이저로 나오는 핑거푸드인데… 위의 빨간 소스가 매웠다. 그리스에서 핑거푸드를 맵게 만들다니 충격적.






나도 드디어 도아를 찍어줄 수 있어!






찍어줄 수 있다고!


저 모자가 아테네 h&m에서 산 건데 검은 옷과 아주 잘 어울렸다. 더불어서 나는 산토리니하면 무조건 하얀 옷 아니면 파란 옷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검은 옷에 모자가 진짜 간지였다. 산토리니쯤 제주도처럼 다녀가는 현지인 바이브.






누가 봐도 산토리니 두 번 다시 못 오니까 하얀 옷 입고 온 사람.






다시는 못 간다니 벌써 슬퍼진다.





이런 것도 하나쯤은 사고 싶었지만… 나는 짐이 늘어나는 게 싫은 1인가구이므로 벽에 붙일 수 있는 것-그러니까 엽서나 마그넷-만 사기로 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볼 때 항상 마음이 아팠다.




Lolita's Gelato


1일 2젤라또.

사진에는 안 찍힌 오렌지맛 젤라또가 맛있는 곳이다. 나는 그러든말든 초콜릿을 먹었지만… 오렌지맛도 한 입 먹어보니 납득이 됐다.


이걸 가지고 석양을 보러 이아 성으로 갔다. 거기서부터 지옥의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여행하는 내내 아크로폴리스 외에는 사람을 많이 못 봤는데 그리스 사람이 거기 다 있었다. 그렇게 보기 어려웠던 한국인도 거기 있었다. 두 번은 못 오겠다 하면서 지나갔던 남자분 잘 귀국하셨을까… 저는 다시 오게 해주기만 한다면야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풍경이 있으니까요.





이런 풍경도 있고요.





해가 지면서 오묘해지던 빛깔.





도아가 초점이 안 잡힌 사진도 분위기 있다고 해줘서 초점을 안 잡고 찍어봤다. 







산토리니 주민 김그리스씨와 함께 좋은 시간.





반투명한 푸른 필름지를 한 장 겹쳐놓은 것 같은 비현실적 풍경.







이런 걸! 보면! 마음이 아픈데!

굳이 사진까지 남겨서 자신을 영영 슬프게 만드는 나는 메저키스트일까…?







이런 건 벽에 걸어둘 수 있는 건데…

아냐 미쳤어? 캐리어에 못 넣어! 하고 돌아섰다.







이건 벽에 걸어둘 수 있고 캐리어에도 들어가는데…

정신 차리자.






바다는 검고 마을은 흰 밤.






하늘은 검고 건물은 흰 밤.





Pitogyros Traditional Grill House - Gyros, souvlaki, kebab.


슈퍼에서 장을 보고 늦은 저녁식사로 기로스를 포장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보는 야경이 너무나 예뻤다. 아무리 찍어도 카메라에 담기지 않아서 다들 현대 기술을 원망했다. 급기야 나는 데세랄을 가져올걸 후회하기까지 했다. (tmi: 데세랄 없음)






주차하고 숙소로 올라가는 길. 너무 예뻐서 남의 집에 주거침입할 뻔.






기로스와 마트에서 사온 컵라면으로 저녁 식사.


여행의 절반을 넘기고 결국 컵라면에 굴복해버렸다. 그래도 그리스의 컵라면이라는 점과… 김치나 고추장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점에 위안을 삼았다.






도아가 맛있게 마신 낮은 도수의 수박맛 술. 







이 숙소는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있다. 1층은 도아와 툰이 쓰고 2층은 내가 썼다. 

이곳은 1층의 화장실. 블랙의 도아가 빨간 화장실과 잘 어울린다.






어메니티가 이렇게 감성적일 일인가.






한밤의 자쿠지타임. 간단한 족욕만 했다. 


이때도 많이 생각난다. 신청곡을 받아서 노래도 틀고 하루만 지나도 기억나지 않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무한정으로 떠들던 한가로운 밤. 


Roka의 버섯은 다시 먹어볼 수 없겠지만, 이아마을의 노을도 다시 볼 수 없겠지만 그런 건 괜찮다. 삶에 정말로 필요한 건 이런 시간이니까.






족욕을 마치고 2층으로 올라왔다. 열쇠까지 분리되어 있는(사실 그래서 귀찮았다) 온전한 내 공간.






이날은 아주 단잠을 잤다.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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