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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Jan 07. 2024

230928) 낙소스 2일

Mikri Vigla Beach >  Apeiranthos


호스트님의 빵과 우리가 사온 과일들로 아침 식사.

역시 탄수화물은 모든 것을 해결한다. 아침을 먹으며 또 아무렇지 않게 투덕거리는 사이로 돌아왔다.


사실 이날 아침에는 기분이 이상했다. 전날 밤 있었던 일의 여파인지 도아와 툰이 나를 두고 바다에 가는 꿈을 꿨기 때문이다. 회귀물의 일종처럼 상황은 계속 바뀌는데 내가 혼자 남겨지는 결말은 똑같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난 바다에 갔지.

낙소스에서 가장 유명한 비치 중 하나인 미크리비글라비치다.

까치발을 들어야 할 정도로 깊게 들어가도 바닥이 다 보이게 맑은 물이다.

그런데도 사람이 없어서 한가로운 지상 낙원 그 자체였다.


나는 아테네의 호수에서 암튜브를 쓸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 물장구나 치기로 했다. 저 삐쭉 나온 바위에 앉아 저 멀리서 수영하고 놀고 있는 도아와 툰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의 화면이 나갔다. 


햇빛이 너무 세서 안 보이는 건가, 싶었지만 차양을 만들어보고 온갖 난리부르스를 해봐도 액정은 켜지지 않았다. 그러다 또 불시에 켜지더니 화면에 벌건 줄이 죽죽 그어지더니 완전히 꺼져버렸다. 2주간의 해외여행의 딱 절반을 지난 7일차였다.


플립은 워낙 액정이 약하기로 유명한 시리즈고 내 핸드폰 역시 3년 가량 쓰면서 두 번 액정을 갈았다. 화면 밝기를 높이면 오래된 텔레비전처럼 화면에 줄이 그어지는 현상 때문이었는데, 나는 원래 화면을 밝게 보는 타입이 아니어서 밝기를 어둡게 낮춰두었다. 강한 햇빛을 따라 화면 밝기가 강제로 최대치가 될 수밖에 없는 곳에서 계속 사진을 찍으니 못 버티고 운명을 달리한 듯하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리스의

낙소스 섬의

바다 한가운데서!

저 아름다운 바다 한가운데서 나갈 생각을 해!


(팩트: 핸드폰 화면은 생각을 해서 나간 게 아니다.)


이때만 해도 여러 가지 희망이 있었다. 지금의 이 상황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플립을 가방에 넣어두고 그리스의 바다를 마음껏 즐겼다.


도아는 나에게 수영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내 등과 다리를 받쳐줄 테니 헤엄만 치라고. 나는 사실 바다나 호수 등 물에 큰 관심이 없어서 수영을 못 하게 되는 게 그다지 슬픈 일은 아니었는데, 물을 좋아하는 도아로서는 많이 마음이 쓰인 모양이었다. 


나는 나에겐 없는 도아의 그런 면을 좋아한다. 물 위에서 발을 떼고 그 애의 팔을 잡았을 때 그냥 기대, 더 힘을 빼고 네 몸을 나한테 다 기대 봐, 도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나에게는 어려웠다. 어떻게 물에서 내 몸에 힘을 빼고 다른 사람을 완전히 믿지?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바다에 누워 있었다. 바닷물이 내 귓가에서 흘렀고 시야에 하늘이 가득 찼다. 그때는 해외에서 고장나버린 휴대폰 생각도, 남은 일주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그냥 자유로웠다. 이상하고 신기했다. 나를 놓고 타인에게 기댔을 때 이렇게 자유로워진다는 게.


도아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말했고 나는 <문라이트>를 생각했다. 왜 다 퀴어영화야 이상하게… 우리는 그저 마음씨 좋은 청년이 요양 환자를 둥가둥가하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나는 애미야 좋구나 라는 뻔한 대사를 내뱉었다.





바위 뒤에 숨은 인어공주 시점 (아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Apeiranthos라는 마을인데 한국어로는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다.


이곳은 비좁은 길을 끝없이 끝없이 올라가야 하는데 그 길이 너무나 예쁘다. 천국에 올라가는 줄. 다만 이때부터 비가 축축하게 내렸다. 그래도 이런 풍경을 보면 잠깐 멈춰서 한 장씩 급하게 찍었다.


이 사진으로도 보이지만 파란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 있어서 맑다가도 비가 내리고 그랬다.




 

Mpakalógatos


다섯 개의 도시와 섬 중에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곳이 낙소스였다.


낙소스는 사람이 없고 한적한 것도, 항구에 위치한 시내의 풍경도 마음에 들지만 식당이 저엉마알 맛있다. 다른 도시의 '맛있다'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느낌. 


여기서 꼭 먹어야 할 건 새우와 홍합, 오렌지 파이. 그리고 그리스 음식은 짠 편이니까 샐러드가 꼭 필요하다. …그냥 다 먹어야 한다는 소리다.







후식으로 나온 초콜릿 요거트.






식당을 나와서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핸드폰 없이 어딘가를 돌아다녀본 건 1n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 상태가 가볍고 편안해서 놀랐다. 이 풍경들을 내가 직접 찍을 수 없고 나를 찍어주는 친구를 찍어줄 수 없었다는 건 슬펐지만.





마을 전체가 소규모 영화의 세트장 같았다. 우디 앨런이나 에릭 로메르 쪽.


사람이 너무 없어서 더 그랬다. 간혹 가다 보이는 사람은 이 세트장에서 고용한 배우들처럼 보였다. 그들 중 몇 명은 도아가 여기다, 하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비키지 않고 못 찍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심지어 한 명은 비키길 기다리고 있는데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버려서 웃겨 죽는 줄 알았다. 반경 5M 내에 핸드폰을 들고 서성이는 사람이 있으면 귀신 같이 알아채고 비켜주는 눈치 DNA는 한국인에게만 있는 건가?


저 샛노란 아저씨(=툰)도 눈치 없이 저기 찍히고 말이야. 색감이 안 맞는다고.





Apeiranthos

색감은 이래야지.


편-안-.







여기서 마그넷도 하나 샀다. 이 가게를 나오는데 여기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여기 앉아보라고 하고는 우리 셋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 사진은 상당히 어색한 가족 사진처럼 찍혀서 지금 보니 진짜 웃긴다. 너무 웃겨서 도저히 올릴 수 없을 정도. 할아버지가 여기가 사진이 잘 나오는 자리라고 가르쳐줘서, 도아가 나를 찍어주었다.


무릎 위의 파우치는 가방 대용으로 들고 다니던 것이다. 그리스에 도착하면 금방 에코백을 살 수 있을 줄 알고 가방을 가져가지 않았다가 내내 저 파우치를 들고 다녔다.

그리고 이 다음날… 그놈의 에코백 때문에 일이 터지고 만다.


사진에 스티커를 붙이는 기능을 처음 써보고 어울리는 스티커 붙이는 재미를 들였다. 촌스럽지만 귀여운걸.






마을이 워낙 작아서 여기도 가보자, 저기도 가보자 하고 구석구석을 다 다녔다. 이곳은 아마 아주 작은 교회.






 


담장 너머에서 빼꼼 하고 나온 귀를 발견했다.


동키 한 마리가 고요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영화의 세트장이 아니라 동화 속 그림에 가까웠던 마을.







계단을 내려가볼까.







독사과를 가지고 은밀하게 내려가는 중 (아님)






이 마을을 돌아다녔을 때가 나에게는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좋았던 시간이다. 날씨도 오락가락하고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나는 여행을 갈 때는 그 지역의 소품 가게까지 알아놓고 가는 편이라 어딘가를 계획 없이 둘러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체크해놓은 스팟으로 동선을 짜놓고 그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단시간에 최대치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있으니까. 


이곳은 상권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사전에 그런 조사를 미리 해둘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저 발길 닿는대로 걷게 됐다. 예쁜 가게가 보이면 들르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이런 게 여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핸드폰과 컴퓨터로 전혀 알지 못했던 낯선 곳을 일단 발을 내딛어 걸어보는 것.


그렇다고 이제 즉흥형이 되겠다는 선언은 아니고… 나는 그냥 이렇게 태어난 인간이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겠지만… 그래서 그날의 경험이 더 특별했다.


낙소스를 생각하면 그 많은 맛집들보다도 이 마을이 먼저 떠오른다. 관광객은커녕 사람 자체가 없이 비어 있던 동네를 한가롭게 걸어다니면서 수다를 떨고 별 거 아닌 일에도 웃음이 터졌던 그때. 그때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사진에도 소리가 담긴다면 도아가 나를 찍어줄 때 했던 말을 다시 들을 수 있을 텐데.






Rotonda - Cafe Bar Restaurant in Naxos


저녁 식사는 마을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식당에서.

노을 보는 자리로 예약하고 갔다.






호강한다 호강해.

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던 뷰.







호강한다 호강해222


뷰가 유명한 곳이지만 음식도 맛있었다.

특히 맨위의 대구 크로켓이 인상적이었고, 모든 음식의 소스가 독특하고 새로웠다. 







아름다운 전체샷.






식사 내내 우리 테이블을 탐냈던 고양이.


특히 반바지를 입은 툰의 다리를 계속 할퀴어서 너무 웃겼다. 너 좀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이런 묘생샷도 건져드렸다.


이 모습을 발견했는데 핸드폰이 없었고… 저것 좀 찍어줘!!!!! 하고 외쳐서 도아가 찍어줬다. 귀국한 뒤 도아가 그리스 여행 사진을 엽서로 인쇄했을 때 우선권을 가진 나는 이 사진을 제일 먼저 골랐다.


온갖 테이블을 얼쩡거리다 결국 직원에게 연행되고… 그 모습까지도 귀여웠다.




 


고양이와 맛있는 음식과 환상적인 노을.

이런 천국 속에서… 우리는 현실로 돌아왔. 그래서 이놈의 핸드폰을 어떻게 해야 할까. 


구글지도에서 samsung을 검색하자 낙소스 시내 안에 매장 한 군데가 떴다. 제품 수리도 하고 판매도 하는 매장이었다. 그래서 순서를 정해봤다.


1. 수리를 문의해본다.

이건 좀 비관적이었다. 플립5까지 나온 마당에 그리스에서 빠르고 신속하게 플립2를 수리할 있을 리가. 


1-1. 수리가 불가능하다면. 해외에서 일주일을 핸드폰 없이 다니느냐?

해 보려면 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불운하게도 내가 이 여행의 계획을 전부 짠 책임자였다. 핸드폰이 켜지지 않았던 비치부터 이 식당까지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다음 행선지를 안내하기 위해 몇 번이나 도아의 핸드폰을 빌려야 했다. 남은 일주일 내내 그럴 수 있을까? 도아에게도, 나로서도 못할 짓이었다.


2. 그러니 새 핸드폰을 산다.


이렇게 정리하니 깔끔했다. 3년은 썼으니 새로 사더라도 크게 손해보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비웠다. 다음날이면 산토리니로 넘어가야 했는데, 산토리니는 전체적으로 물가가 비싼 곳이라 핸드폰도 더 비싸면 비쌌지 쌀 것 같지는 않아서 이날 안에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가기 전에 시내의 그 매장에 들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추가로 시켰던 디저트가 나오지 않아서 한참을 기다렸다. 알고 보니 주문이 아예 안 들어간 거였던…




 


비스킷에 바나나와 견과류, 크림을 얹어서 만드는 바노피 파이.

바나나. 견과류. 이거 완전 건강 음식이네.


아홉 시까지라는 매장 영업 시간을 놓칠까봐 후루룩 떠 먹었다. 






그래도 이 파이를 기다리면서 밤이 되어가는 풍경도 보았다.

달처럼 보이는 건 이 가게의 등이다.

일부러 달 같은 등을 골랐을까?





잘 먹고 잘 보고 호다닥 시내의 전자제품 매장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수리는… 2주가 걸린다는 답변을 들었다. 2주면 그냥 그 사이에 새 핸드폰을 만들어오는 거 아니에요?


이건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 바로 넘기고 새 핸드폰을 둘러보았다. 세상에. 갤럭시 S23이 2백만원이었다. 한국에서는 백만원 안쪽인데! 일주일이면 한국에 돌아가는데 S23을 이백만원 주고 살 수는 없었다.


차선책은 보급형 A시리즈였다. 거기서 제일 저렴한 게 199유로, 한화로 28만원 가량의 A14였다. 도아의 폰으로 당근마켓에서 검색해보니 보급형도 거래된 내역이 있어서, 여기서 쓰다가 한국에 돌아가면 팔고 S23을 구매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국에는 출시도 안 된 낙소스 리미티드 에디션… 핸드폰과 9.9유로짜리 필름까지 사서 붙이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시작된 또 다른 고단한 밤…


카톡도 지메일도, 인증 번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스 현지 번호 역시 이전 핸드폰에 들어 있었으므로 그 핸드폰을 켤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이 핸드폰도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도아가 내 한국 유심을 끼워서 인증 번호를 받아주어서 이것저것 깔았는데, 그러고 나니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나도 피곤하고 나 때문에 못 자고 있었던 동행인들에게도 미안해서 당장 필요해보이는 어플만 설치하고는 자 이제 됐어! 고마워! 하고 끝내버렸다. 그래서 정작 은행 어플 인증을 안 해버렸고… 이때문에 바로 그다음날에, 그리고 한국에 가서도 통한의 후회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역시 미래의 일이었다. 이날은 그저 일을 해결했다는 후련한 기분으로 단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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