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경 Dec 31. 2023

230927) 아테네 5일, 낙소스 1일

아테네 항구 > 낙소스 항구 > 아폴론 신전

처음으로 페리를 타고 섬으로 이동하는 날 새벽, 엄청난 물소리에 잠에서 깼다. 


잠결에 동행인 중 한 명이 이렇게 요란하게 씻는 건가…? 하던 순간 어두웠던 방 안에 번쩍한 빛이 들이쳤다. 그리고 몇 초 뒤에 천둥이 울렸다. 물소리는 빗소리였고 동행인이 아닌 아테네가 씻겨나가는 소리였다.


이대로라면 연착은 확정이고 결항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페리를 예약한 사이트에서 별다른 공지가 없어 일단은 항구에 가야 했다. 


나는 체크아웃을 준비하면서 페리 환불 조건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때 도아는 아테네의 다른 숙소를, 툰은 비행기편을 검색하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물밑에서 살길을 도모하고 있었던 계획형들.






그런데 우리가 숙소를 나설 때가 되니 거짓말처럼 비가 갰다. 










덕분에 안심하고 체크아웃.

어디한번 MZ스러운 스티커를 붙여봤다. 


아니면 말고.
















차에 타기 전 올려다본 아테네의 새벽하늘은 어쩐지 묘했다. 

이게 내가 찍은 아테네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페리에 타기 전 멀미약 껌을 처음으로 씹어봤는데, 정말 혀가 아릴 정도로 매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타 본 페리는 또 몸이 떨리게 추웠다. 이렇게 맵고 추운데도 자리에 앉으니 잠이 쏟아졌다. 멀미는 개뿔… 그냥 자느라 기억이 없다.







내가 자는 사이 도아와 툰이 갑판에 나가 찍어온 사진.

방향을 잃고 잘못 쌓아올린 소프트아이스크림 같은 구름.






바다는 가끔은 하늘 같은데 가끔은 산 같다. 아주 멀리서 올려다본 파란 산.







정신 차려보니 낙소스에 도착했다.






멀리 보이는 아폴론 신전.







아테네를 떠나올 때는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불었다가 페리에서는 그렇게 춥더니, 낙소스에 내리자 태양이 지글지글 작열했다.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 꼬치구이가 된 기분으로 차를 렌트해 캐리어를 넣어놓고 시내로 걸어갔다. 낙소스의 시내는 항구의 바로 앞에 있어서 여러모로 편하다.







Taverna Naxos


햇빛이 내리쬐는 날씨 때문에 천막 안에만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우리도 몇 없던 테이블을 겨우 잡았다.








그리고 음식이 나왔는데…

여러 말 하지 않고 이렇게만 말하겠다.

우리는 그리스에서 2주 동안 오로지 그리스 음식점만을 다녔다. 구글 평점 최소 4.6점 이상, 웬만하면 4. 7점은 보장된 곳으로. 그리고 여행 마지막 날 마지막 식당에서 각자 베스트 식당을 골랐을 때, 셋 다 이 곳을 골랐다.


새벽부터 페리를 타고 와서 지친 상태로 천막 아래서도 더운 기운이 남은 채 널브러져 있다가 입에 밀어넣었던 새우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제주도에라도 지점 하나만 내주세요….







마트에서 간단하게 장 보고 와서 숙소에 체크인했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 숙소.

빵과 버터, 주스 등 간단한 식사거리도 비치되어 있어서 아침마다 챙겨 먹었다.





낙소스는 아테네만큼 숙소가 다양하지는 않아서 나와 도아가 같은 방을 썼는데, 저 침대는 분리가 되어서 어느 정도 떨어뜨려서 썼다. 






툰의 방.

도아가 찍어둔 사진 덕분에 지금 처음 봤다.







허허벌판 한가운데 있는 곳이라 조용해서 좋았다.

이때 이 옷을 입었다가 구김이 너무 심해서 갈아 입었다.








이날의 유일한 일정은 아폴로 신전에서 노을 보기.






어딜 찍어도 그림이 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찍은 사진들은… 그러고 보니 이날이 사건 발생 전날이었다.







노을로 열리는 문.






시내로도 열리는 문.





신전에서 바라보는 시내.

고작 십 분쯤 걸어왔는데 건물들이 레고처럼 보인다.






뭘 그렇게 열심히 찍고 있니…

그거 다 날아가…






해가 진다.





떠나가는 배 받쳐주기.





안 받쳐줘도 잘 가지만.


여기서 내 플립2이 정말 열일을 했다. 화질로 늘 다른 핸드폰들에게 밀려서 니가 접히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라고 구박받던 그 핸드폰이 이 노을의 색감을 막히게 잡아냈다. 플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카메라로 놀라긴 처음이었다. 그건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뭔가를 해보려던… 마지막 몸부림이었나보다.

그럴 거면 그 사진을 내가 간직할 수는 있게 해 줬어야지.






저녁 먹으러 가라고 나온 달.






그렇다면 먹으러가야지.

잘 놀았습니다.




Vassilis Tavern


농어가 유명한 식당. 저 해산물 플레이트의 새우 아래에 어딘가 깔려 있는데 맛있었다. 농어와 도미, 오징어 등 한국에서는 돈 주고 먹지 않는 해산물들을 1년치는 먹었다.


두 번째 사진 상단의 깨가 뿌려진 건 치즈를 튀긴 그리스 음식, 사가나키다. 요거트가 유명한 만큼 치즈도 신선하니 그리스에 가면 꼭 먹어봐야할 음식 중 하나다. 멀쩡한 척 글쓰고 있지만 입가에선 침이 흐르는 중….



나는 여행 내내 툰과 투덕거렸지만 그건 대부분 도아에게 보여주는 공연 같은 거였다. 툰과 나는 이 저녁식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싸우기 직전까지 갈 뻔했다. 그런데 나는 툰표정을 굳히고 입을 다물기 전까지 그게 싸움 직전이었다는 몰랐다. 


나는 툰과 내가 아는 정보가 서로 달라서 서로 조금 세게 의견을 내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입장에서는 내가 계획을 총괄했으니 내가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나는 내가 주도하는 일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걸 못 견뎌서 출국 직전에도 확실히 알아보고 온 터였다. 그러니 아직 잘못 알고 있는 툰에게 그게 아니라 이거야! 라고 말했던 건데, 그건 내가 객관적인 정보 전달을 가장 우선시하는 성향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를 잘 몰랐다. 내가 얼굴은 그렇게 생겼지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저 정보 전달 기능을 수행하는 중이라는 걸 몰랐을 것이다.


식사 자리가 그대로 침묵에 잠겼을 때 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 이 얘기를 하다가 이렇게까지 된다고? 난 그냥 산토리니 항구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했을 뿐인데? 무언가 해명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항구에 위치한 식당가는 한밤이 되자 급격히 추워졌고 무엇보다 추위에 약한 나는 그대로 의욕을 잃었다. 덜덜 떨리는 오한이 비바람이 불던 그날 새벽 아테네에서부터 서늘한 페리까지의 모든 피로를 불러왔다.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숙소에 도착해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그가 100% 감정형이라고 말했던 게 떠오른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가 나를 몰랐듯이 나도 그를 몰랐다. 그날 식사의 흐름이 내게 이해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 미세한 감정의 인과는 내가 항상 몰라서 헤매는 거니까. 


아직도 그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 어렵다. 주위에는  성향이 90%인데도. 그래서 이렇게 너무 뒤늦게 깨닫는다. 언제쯤 사람을 아는 사람이 될까.


우리가 잠든 뒤에 그가 한밤중에 차를 끌고 드라이브를 나갔다는 건 며칠 뒤에야 알았다. 평소에는 혼자서 드라이브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때 홀로 컴컴한 섬을 다니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나는 영영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전 05화 230926) 아테네 4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