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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Dec 17. 2023

230925) 아테네 3일

불리아그메니 호수


도아가 아침으로 무화과를 깎아주었다.





자르지 않은 무화과는 처음 봤다. 감자 같이 생겼지만 맛있었다.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우리는 한가롭게 짐을 쌌다. 

이날의 일정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랬다.


1. 렌트카 회사에 가서 예약했던 차로 돌아온다.

2. 미리 문 앞에 둔 캐리어를 챙긴 뒤 체크아웃을 한다.

3. 근교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

4. 불리아그메니 호수에 가서 수영을 한다.

5. 저녁을 먹고 수니온 곶에서 노을을 본다.

6. 도심으로 돌아와 다음 숙소에 체크인을 한다.


문제가 생긴 건… 1번부터였다.


그리스에서 렌트를 하기로 했을 때, 유럽에는 오토가 많지 않고 있어도 스틱보다 두 배 이상은 비싸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후 낙소스, 산토리니, 크레타에서 가격 비교를 해봤을때 두 배 차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오토가 없고 스틱만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툰은 스틱 운전 경험이 많지 않아서 가기 전에 한국에서 렌트해 연습해보려고 했는데 스틱을 빌릴 수 있는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스크린 운전면허 연습장에서나마 해보고 온 덕인지 시동은 무리없이 걸렸다.


문제는 우리의 숙소가 너무 높은 지대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필로파포스 언덕 바로 앞이었으니까. 전날 밤까지만 해도 그래서 좋았던 게 독으로 돌아올 줄이야.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몇 번 시동이 꺼졌고 앞뒤 양옆으로는 계속 차가 오고 있었다. 심지어 오르막길에 있을 때 시동이 꺼지면 뒤로 내려가기 마련이라, 뒤 차가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사고가 날 뻔하기도 했다.


결국 차를 적당한 곳에 세워놓은 뒤 나와 도아가 숙소에 가서 캐리어를 가지고 내려와 체크아웃을 했다. 셋 다 혼이 빠진 상태였으나 어찌저찌 대책을 세워봤다. 렌트를 취소하는 건 불가능했고, 내 생각에는 유난히 높은 지대에 있는 이 언덕만 내려가면 이렇게 시동이 꺼지는 일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논의 끝에 계획을 수정했다.


1. 이 차로 우선 다음 숙소까지 가서 체크인을 한다.

2. 1번이 괜찮았다면 근교의 식당까지 가서 점심을 먹는다.

3. 2번이 괜찮았다면 불리아그메니 호수까지 가본다.

4. 3번이 괜찮았다면 수니온 곶까지도 가본다.


동선이 다음 숙소 > 식당 > 호수 > 곶 순서여서 가능한 계획이었다. 한 마디로 일단 조금 움직여보고, 괜찮으면 조금 더 가보고, 또 괜찮으면 조금 더더 가보는 식이었다.


다행히 이 내리막길을 내려오자 예상대로 그만큼 시동이 꺼지지 않았고, 평지에 있으면 꺼지더라도 뒤 차와 부딪힐 일이 없어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두 번째 숙소에 무사히 체크인. 

짐만 두고 근교의 식당으로 직행했다.






도심을 벗어나자 완전한 평지가 나타났다. 우리의 고행은 이걸로 끝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신나게 달렸다.





O Mpakalis


주말에 웨이팅이 심하다던 식당은 월요일이어서인지 사람도 없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됐다 됐어, 하면서 테이블을 잡고 앉으려던 때였다.

어?

하고 도아가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체크아웃하고 나온 숙소의 열쇠였다.


우편함에 넣어두고 왔어야 했는데, 차의 문제로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열쇠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그 숙소에 여분의 열쇠가 있어서 호스트에게 일정을 마치고 가져다줘도 될지 물었으나 그는 더 빨리 가져오길 원했다. 그래서… 밥만 먹고 다시 그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때부터 도아의 자책타임이 시작됐다. 나는 나와 도아가 둘 다 잊어버려 생긴 일이라고 위로했지만 나도 누구와 있었든간에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나였다면 내 책임이라고 여기는 종류의 사람이다. 우리는 성격이 정말 다르지만 이런 면에 한해서는 또 비슷해서 그때 도아가 힘들었을 마음을 나는 잘 알았다.


게다가 도아는 내 생일을 망치고 있다는 자책까지 얹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렇다, 이날은 내 생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쯤 되니 전날까지가 지나치게 평화로운 여행이었고 이제서야 나다운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점이 내 생일인 건 좀 킹받지만.


역시 내 생일 호락호락하지 않지.

이 문장이 이날의 내 키워드 중 하나였다.





그와중에도 맛있는 건 맛있다.

그릭 치즈를 얹은 샐러드와 무사카, 토마호크 스테이크.

오늘 뭔가 이상해… 불길해… 하다가도 오오우! 하면서 고기를 썰어먹었다. 불리아그메니 호수 가시는 분들은 여기에 들르세요. 체크아웃할 때 열쇠는 꼭 숙소에 두고. 


그래도 생일이니 점심을 계산하겠다고 멋있게 나섰는데, 카드를 리더기에 반대로 꽂아대며 직원에게 큰웃음을 선사하고… 제대로 꽂았는데도 결제가 안 됐다. 알고 보니 내가 트레블월렛 카드에 충전을 안 해놓고는 밥을 사겠다고 나선 거였다. 뭘까? 그냥 그날 하루종일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게 분명. 결국 나중에 갚기로 하고 툰이 대신 결제했다. 이게 내가 밥을 산 건지 만 건지….





첫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이때 네비게이션의 "살짝 우회전하세요"에 셋 다 빵 터졌다. 그 감정 없는 어조로 "살짝" 우회전이라니. 이후로 우리는 지도를 보면서 어딘가를 찾아갈 때마다 여기서 살짝 우회전해, 하고 써먹곤 했다.


오늘 뭔가 이상해, 심상치 않아, 하다가도 "살짝 우회전" 같은 말 한 마디에 웃는 사람들이어서 그 불길함에서 곧장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당시엔 일이 점점 꼬여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 와서 보면 너무나 별거 아닌 일들이었다. 차는 사고만 안 나면 되고 열쇠는 가져다주면 되는 거니까. 시내에서 먹을걸 왜 근교로 와서는, 그런 생각도 했지만 다른 섬으로 떠나는 날이 아닌 게 어딘가. 페리에서 열쇠를 발견한다면… 그런 상상은 하지 말자.


웬만한 문제는 시간이나 돈을 쓰면 해결된다. 며칠 뒤에는 정말로 열쇠 때문에 돈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기긴 하데… 평소의 나는 소비를 아끼면서 저축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얼마라도 날리면 내내 곱씹으며 원인을 분석하고 나 자신을 원망하는 데 하루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이 여행에서는 그런 자아와 잠시 이별했다. 어떤 손해 비용도 내 옆의 사람이나 이 여행보다 중요할 수는 없고, 오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오늘의 기분은 내가 정한다는 것. 내가 이 사람들과 오늘을 즐겁게 보내기로 했다면 내게 일어난 일과 상관없이 그럴 수 있다는 것. 그런 걸 나는 이날 배웠다. 서른세 번째 생일날.


물론 또 며칠 뒤 배운 걸 다 까먹고 감정이 터지는 일도 생기지만… 그러니까 여행이고 그러니까 인간이겠지.






지긋지긋한 열쇠를 반납하고 홀가분하게 호수로 떠났다.

도심을 빠져나오면 멋진 해안도로가 펼쳐져 두 번을 왔다갔다해도 지루하지 않았다. 진짜야. 정신승리 아니야.





드디어 호수에 도착.

사실 이때는 다들 반쯤 해탈한 상태로 털레털레 간 감이 없지않아 있는데… 주차하고 이 풍경을 내려다보는 순간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





어쩜 입구도 동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지.





사설업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입장료가 16유로로 비싼 편이다. 그만큼 시설은 깔끔하고 잘 관리되어 있다. 이후에 크레타의 비치에서 선베드 2개를 15유로에 빌렸던 걸 생각하면 또이또이같기도 하고.

음식과 음료도 있지만 역시 비싸고 맛은 그저 그렇다고 해서 먹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절벽이 호수를 품고 있는 형태라 비치보다 물이 차갑고 금방 추워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차 문제와 열쇠 문제로 이미 많이 쌀쌀해졌을 때 도착했다.





서둘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일단 발만 넣어… 보려고 했으나, 저기 앉아도 내 발은 물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기 앉으면 닥터피쉬가 잔뜩 와서 발을 물어뜯어준다고 했는데. 이 호수 고소할 거야.





도아의 발은 당연히… 안정적으로 물에 잠겨서 닥터피쉬에게 먹이를 제공했다.

여기 닥터피쉬 진짜 크다. 그리고 진짜 많다. 닥터피쉬는 8년 전에 호주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는데, 그걸 확대해서 쏟아부은 버전 같았다.





앉아서 물장구만 치는 건 포기하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는데, 물이 상상 이상으로 차가웠다. 찬물에 들어가기 벌칙을 수행하는 느낌이었다. 먼저 들어간 도아가 한 번 참고 빨리 들어오면 좀 낫다고 해서 아아아앜 비명을 지르며 상체까지 담갔다. 도아의 말대로 몸을 완전히 적시자 체온이 점차 물에 적응해나갔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내가 수영을 전혀 못한다는 점이었다. 나처럼 수영을 못하는 도아가 암튜브라는 존재를 알려주었는데, 공기를 불어넣고 팔에 끼워서 물에 뜨게 하는 도구였다. 수영을 못해도 이걸 끼우면 헤엄을 칠 수 있다고 해서 나도 구입하고 여기서 처음 써봤다.


일단 물에 뜨긴 뜬다. 그런데 헤엄은 팔에 근육과 힘이 있어야 칠 수 있는 거였다. 나는 그게 없어서 둥둥 떠다니기만 했고, 내 의지와는 다른 곳으로 떠내려가기도 했다. 이런 팔로는 물에 떠 있는 것도 힘들고 물은 더 차가워져서 덜덜 떨며 동행인 중에 가장 먼저 나왔다.






그러니까 여기에 얼마나 있었을까? 아마 십 분쯤?

내 인생 전체에서는 찰나에 가까운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진을 보면 십 분짜리 단편영화의 필름이 머릿속에 재생된다. 고단했던 하루를 보내고 아무 걱정 없이, 아무 생각 없이 호수 한가운데를 떠다니며 올려다본 하늘과 절벽.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물 속에서 생애 처음으로 땅을 딛지 않고 팔다리를 저어본 경험. 그땐 사진도 캠코더도 찍을 수 없어서 그건 우리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기억이 되었다.





옷 갈아입고 나와서 거울 셀카.

거울만 보면 셀카 찍는 우리 제법 귀여워요.

의도한 건 아닌데 옷을 쌍둥이처럼 입었다.





예쁜 길만 보이면 저기 걸어가봐, 하는 내 친구 제법 귀여워요.






저 허벅지의 멍이 25kg를 끌어내리다 생긴 그 멍이다. 이때는 그렇게까지 진하지는 않았다.


툰이 나오기 전에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놀고 있을 때였다. 우리 또래의 젊은 여자가 다가와서 내가 너희 찍어줄까? 물었다.


유럽에서 먼저 이렇게 물을 때는 보통 내 폰을 들고 튀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는데 그리스에서는 예외다. 한국에서도 정말로 길을 몰라서 묻는 사람과 인상 좋으신데 커피 한 잔…은 대번에 구별되듯이, 이 사람들의 의도 역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어디서 발현되는지 모를 그 선의.






이름 모를 친절한 사람이 찍어준 예쁜 사진.

이후에도 이런 사람들을 도시마다 만났다.





여행의 마지막 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고를 때 도아는 이 호수에서 수영하던 순간을 골랐다. 그리고 차 때문에 이곳을 포기하고 싶어했던 자신을 설득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도아는 내가 낸 의견에 자기 주장을 하는 일이 많지 않다. 자신의 의견은 있지만 여러분을 따를게요, 하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설득해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뭐랄까 나에게는 이런 사람이 외계인보다 신기하다. 인격적으로 가장 진화된 인간 유형이 INFJ가 아닐까 하는 생각.




Ark

호수에 머무른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수니온 곶에 가기엔 시간이 애매해 포기했다. 대신 석양 뷰로 유명한 근처의 식당을 찾아갔다.





즉석으로 검색해서 간 곳이라 음식 맛이 다른 곳처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맛이 없지는 않은데 내가 데려간 곳들이 전부 다 맛있는 곳이었고, 여기는 나름 고급 레스토랑이어서 가격은 비싼 편이라 더 그랬다. 나는 일행들을 데려가는 식당은 몇날 며칠을 찾고 당일에도 아침부터 도착하기 전까지 정보를 줄줄 꿰어놓는 맛집 한정 완벽주의자 타입이라 내 동행인들을 이렇게 평범한 맛의 식당에 데려갔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이곳은 단지 호수 앞에 자리한 식당이라 그저 뷰가 다 했다. 호수도 예뻤지만 저 빨랫줄처럼 널린 분홍색 구름을 보고 우리는 계속 신기해했다.






호수에서 나온 우리는 다른 호수를 보면서 밤을 맞았다. 이제 더 이상 남은 일정도, 해야 할 일도 없이 천천히 식사했다. 이날의 키워드를 하나씩 말하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근처 공용주차장에 주차하고 와보니 숙소 바로 옆에 있는 주차장도 저렴한 것 같아서 차를 다시 가져오기로 했다. 도아와 툰이 나에게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배려해줘서 마다하지 않고 비척비척 들어왔다.





그런데 차를 가져와서 주차만 하는 것치고는 너무 오래 걸리고 있었다. 또 뭔가 문제가 생겼나 불안해 연락했는데 오고 있다는 답장이 왔다. 안심하고 소파에 앉아서 껌뻑껌뻑 졸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깼다. 현관 너머에서 내 이름을 부르면서 빨리!!!! 이거 먹어!!!! 하고 우당탕탕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대뜸…





초콜릿 아이스크림 콘을 손에 쥐게 되었다.





리본을 묶은 초콜릿 상자도 함께.

도아와 툰이 사온 내 생일 선물이었다.


근처의 초콜릿 가게에서 샀는데, 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오래 걸리는 바람에 젤라또가 녹기 시작했고… 도아의 손에 흐르고 난리가 난 거였다. 정말 이날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녹기 전에는 이런 모습이었다고… 샀을 때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이때만 해도 선물 샀다고 들떠 있었다며. 이 친구 귀여워서 어쩜 좋아.





맛이 다 다른 초콜릿. 먹으면서 재료를 맞혀보는 재미가 있었다.


생일 선물로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과 희한한 맛이 나는 초콜릿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같이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서도 먼저 들어와 쉬고 있는데 한참을 안 오던 동행인들이 급하게 뛰어들어와 아이스크림을 내민 장면은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과 영상으로는 담지 못해 우리만 관람한 감독판의 한 씬으로.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두 사람은 소파에 늘어졌고,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를 먹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그건 아마 생일을 마무리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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