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아테네에 도착했지만 우리는 입국 심사를 대기할 때부터 마음이 초조했다. 숙소에 가는 차편으로 예약한 택시의 기사님이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뒤부터였다. 이 사진도 아테네를 떠날 때 찍은 것이다.
우리가 늦은 건 아니었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마음이 불편한 K-유교인들은 분업을 했다. 택시를 예약한 도아가 먼저 가서 기사님과 접선하는 사이에 나와 툰은 수하물을 찾아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짐은 더 나오지 않지. 나는 캐리어가 어디서 나올지 몰라 툰과 다른 구역에 서서 캐리어를 기다렸다. 기사님과 어색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도아의 카톡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 도아의 캐리어가 툰 쪽으로 나온 뒤에, 하필 툰과 내 캐리어가 동시에 내 쪽으로 나와버렸다. 내 캐리어는 그나마 10키로도 안 됐지만, 툰의 캐리어는 자그마치 25kg가 넘었다.
1, 2분만 더 기다리면 툰이 알아서 잡을 텐데 나는 도아가 기사님과 힘든 내향형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꽂혀서 그 25kg짜리를 냅다 잡아채버렸다. 그러면서 캐리어가 내 왼쪽 허벅지와 부딪혔다. 하루쯤 지나자 허벅지에 퍼런 멍이 들었고 그 멍은 2주의 여행 내내 내가 반바지와 수영복을 입은 사진에 틈틈이 등장했다. 그리스 신고식 아주 멋져.
심지어 내 캐리어는 유리 판넬 너머로 빠뜨려서 툰이 주워올렸는데, 찍찍이를 단단이 붙였던 캐리어 커버가 벗겨진 채였다. 2주 뒤에 커버 없이 다시 싱가폴 항공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온 캐리어에는 누군가 발로 찬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알콜 스왑으로 닦아내니 깨끗해졌지만 어떻게 그 커버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을 수 있을지 아직도 의문이다.
내 허벅지를 희생하며 일이분이라도 빨리… (의미없다 정말) 택시를 타고 도심으로 나갔다. 뉴질랜드 마피아의 행동대장 넘버2 정도의 인상이었던 택시기사님은 허겁지겁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우리를 보자마자 사람좋게 웃었다. 그리고 숙소로 가는 동안 간헐적으로 올림픽 경기장과 박물관 같은 관광지가 보이면 화통하게 설명해줬다.
나는 기나긴 비행에 지쳐 있었던데다 빨리 기사님한테 가야 한다고 초조해 하다가 남의 캐리어에 허벅지 멍들고 내 캐리어는 커버가 없어져 있고 이런 일들에 공항에서는 혼이 쏙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모는 택시 안에서야 아테네를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이 기사님은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 그리스 사람이었고 2주 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들, 먼 나라에서 온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이들 중 첫 번째 사람이었다.
우리의 첫 숙소, 그리고 가장 비싼 숙소.
원래 예약하려고 했던 곳이 가격이 너무 올라서 차선책으로 택한 곳인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아크로폴리스도 가깝고, 필로파포스 언덕의 입구는 10초컷이다.
단점을 꼽자면 세 가지 정도가 있다.
화장실은 두 개지만 위 사진의 화장실은 샤워가 불가하고 가능한 곳은 하나뿐인데, 배수구의 물이 느리게 빠진다는 점.
2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점.
건물 입구도 열쇠로 열고 들어와야 하는데, 현관문을 여는 방식이 서로 달라서 익숙해지기까지 좀 헷갈릴 수 있다는 점.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매일 그날그날 인상적인 것들을 뽑아서 키워드로 정리했는데, 이날의 키워드 중 하나로 도아는 '열쇠와의 전쟁'을 적었다. 그때는 몰랐지. 이 숙소 체크아웃하는 날 '열쇠와의 전쟁'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적게 될 줄은.
유럽 여행할 때마다 늘 드는 생각. 제발… 도어락 좀 쓰면 안 될까…?
그 외에는 그저 좋은 곳이었다. 아, 보다시피 목재로 된 마룻바닥이라 걸을 때 소리가 나지만, 고작 이틀을 묵는 동안에는 그것도 낭만이었다.
1층에는 주방과 거실이 있고, 2층에 샤워기가 포함된 화장실과 침실 세 개가 있다.
씻는 순서를 양보한 대가로 내가 가장 큰 방을 배정받았다. 아마 여기가 마스터 베드룸인 것 같았다. 이 숙소에서 주인님이었다가 다음 숙소에서는 하녀 방을 쓰게 된다. 마치 몰락한 귀족처럼.
툰의 방과 도아의 방.
그런데 참 그리스 사람들 사진 못 찍는다. 이런 집을 왜 그렇게밖에 못 찍었을까? 도아가 이 사진들을 호스트에게 돈 받고 팔면 좋겠다.
이렇게 아름다운 창도 있는데.
잠시간 숙소에서 뒹굴거리다가 밥을 먹으러 나왔다. 이 숙소는 말했듯이 필로파포스 근처에 있어서 지대가 아주 높다. 이날은 이 도로가 정말 낭만적으로 보였는데… 차를 렌트하고 올라오던 날을 생각하면 매우 다르게 보인다. 알고 보면 섬뜩한 사진인 거지. 이 사진에 제목을 붙여보자면 스틱 자동차로는 이곳을 올라올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여유로운 한때를 즐기는 모습이랄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사진을 정리하면서 나는 오랜만에 남이 보는 시선으로 내 몸을 보게 되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사진을 찍힐 일이 별로 없으니까. 음,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나? 이해하다가 확실히 보기 좋은 상태는 아니잖아, 생각하고서는 놀랐다. 평생 이 몸으로 살아야 하는 나 자신마저 스스로를 그렇게 판단했다는 사실에.
Neratzia Cafe Bistro
그리스에서의 첫 식사는 브런치.
도아와 나는 뜬금없는 타이밍에 생각이 통할 때가 있는데(우리는 그걸 뇌 동기화라고 부른다) 이번 여행에서 맛집을 담당했던 나는 왠지 첫날은 브런치를 먹고 싶을 것 같았다. 마침 숙소에서 가까운 곳이 있어 체크를 해놨는데, 도아가 브런치가 먹고 싶다고 해서 당장 나섰다.
아직도 생각나는 오믈렛과 팬케이크. 특히 오믈렛은 다른 곳에서도 몇 번 더 먹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이곳의 오믈렛을 이야기했다. 맛있네. 하지만 첫날 먹은 그 오믈렛은 이길 수 없어.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디서나 오믈렛을 먹을 때면 늘 말할 것 같다. 아테네의 그 오믈렛은 이길 수 없어. 동남아 3박 4일 다녀와서 열대과일 3년 4년 말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화이트초콜릿! 그래도 브런치인데 주스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해서 내 안의 초코를 외면했다가 계속 아른아른거려서 막판에 추가주문했다. 그래서 사진은 없지만 오믈렛과 더불어서 여기서 꼭 시켜봐야할 메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진짜 안 시켰으면 어쩔 뻔했냐고. 이 이후로 많은 초콜릿 음료를 마셨지만 그것들도 모두 이곳의 화이트초콜릿을 따라가지 못했다.
가게를 나와서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중심지에서 약간 벗어난 골목이어서인지 수상하리만큼 사람이 없었다. 관광객은커녕 사람 자체가 우리밖에 없을 정도에 가까워서 뭐랄까… 좀비 영화의 평화로운 오프닝 느낌. 물론 이때의 평화가 이후에 일어날 일들의 폭풍전야였으니 아주 틀린 비유는 아니다.
미래를 예감하지 못한 채 우리는 그저 즐거웠다. 마트에서 간단하게 장도 보고, 베이커리에서 빵도 사고. 우리의 첫 아테네를 마음껏 만끽했다.
Dolce Far Niente
첫 식사에 이어서 첫 젤라또.
거의 젤라또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중…. 의지의 까치발 보게.
그러고 보면 우리는 주문을 할 때도 분업이 훌륭했다. 나는 맹세코 영어를 못하는데… 두 사람이 나에게 영어를 맡겨서 내가 주로 저렇게(빨려들어가며) 주문을 했고 총무를 맡은 툰이 돈을 꺼내 계산을 하는 사이 도아는 자리를 맡거나 사진을 찍어줬다. 이런 분업이 되는 여행 내 생에 또 있을까.
리뷰에서 피스타치오 맛 평이 좋은 걸 보고 시켰더니 과연. 피스타치오를 완전히 농축해놓은 듯 진한 맛이었다. 사진 보니까 또 침 고여. 이 이후로는 또 초콜릿의 늪에 빠져 피스타치오 맛을 더 못 먹어본 게 아쉽다.
동네를 누비다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한 내향형들이라 이삼일에 한 번씩 이런 시간을 가지기로 했는데, 나름 우리만의 이름도 지어서 붙였다. 그리스어로 '혼자'를 뜻하는 모노스를 붙인 모노스 데이. 각자 시간을 보내다 만나면 더 반갑기도 하고, 모여서 식사하며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공유하는 건 이런 시간이 준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나는 첫 모노스를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보내기로 했다. 숙소에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고, 아테네 전체를 내려다보는 조망으로 유명해서 첫날을 마무리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올라가는 길에 거북이를 만나서 열심히 기어가는 모습을 잠깐 홀린 듯이 보았다. 이렇게 열심히 기어가는 동물을 나는 오랜만에 보았다. 느린 만큼 열심히 움직였다. 어디로 가려던 거였을까? 시간이 많았다면 거북이의 목적지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나는 한낱 관광객이어서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걸 보고 싶어했다. 필로파포스 언덕은 한곳에서 가장 많은 건물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아테네의 상징 아크로폴리스를 포함해서.
카메라의 화질이 좋지 않아 내내 구박받았던 나의 Z플립2가 이때 모처럼 쓸모를 발휘해주었다. 당시엔 몰랐으나 이때가 마지막으로 제 할 일을 다했을 때였다.
마치 도시를 녹여버리고 있는 것 같은 태양….
그러다가 한 순간에 노을이 졌다. 나는 다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이 모습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었다.
이 풍경을 고요하고 여유롭게 누리면서 행복을 느꼈는데, 또 한편으로는 다른 두 사람도 이걸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노스가 그래서 재미있었다. 혼자여서 좋다고 생각할 때도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아테네의 도심에 조금씩 불빛이 들어왔다. 저 신전에 등을 설치할 생각을 누가 했을까? 제우스? 당신이 하셨나요…?
신과 인간이 잠드는 시간에 더 아름다운 신전.
언덕을 내려올 때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 완전한 암흑이었다. 핸드폰의 손전등에 의지해 내려오는데 내리막도 가팔라서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의 위험을 느꼈다. 언덕에서 나오자 빛이 나타났다.
필로파포스에서 내려왔는데도 빛나는 신전이 보였다.
여행이 끝나갈 때 도아는 아테네를 제일 좋았던 도시로 꼽았다. (tmi: 하니아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기 전이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시내 어디에 있더라도 고개를 들면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스마트폰과 SNS와 전기차 사이에 살면서도 사람들은 이천 년도 더 전에 지은 신전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당시의 과학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지은 그 신전을. 아크로폴리스가 아름다운 건 신이 아닌 사람들이 그만큼이나 행복해지고 싶어했다는 증거다.
아테네의 도심에서는 어디서든 저 신전이 보인다. 자꾸 마주치다 보면 언젠가는 느낄 수 있다. 이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도 불안과 고민이 있었고 그래서 뭐든 해보려고 했다는 걸. 잠 못 드는 사람들에게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밤에도 환한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