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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Nov 26. 2023

230922) 출국

인천 > 싱가폴 > 아테네

이 여행은 시작 전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출국 3일 전에 아테네 근교인 메테오라로 가는 기차를 예매한 사이트에서 메일이 왔다. 기차 시간이 바뀌었다는데, 그 시간대로라면 메테오라를 가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예매를 취소했다. 컴플레인을 남기는 폼에 내가 탈 기차 시간을 쓰고 이걸 취소하겠다는 요청서를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예매 내역에 들어가서 취소하시겠습니까? 네! 버튼만 누르면 취소되는 우리나라 KTX 만만세…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티켓값은 들어오지 않았다. 현금이 든 봉투를 기차로 실어날라서 가져다주는 걸까?


메테오라를 가려고 했던 날에 아크로폴리스를 가는 게 동선 상으로 효율적이었고, 그날은 아크로폴리스에 무료 입장하는 날이었으므로 그 예매 티켓도 취소하려고 했더니 그건 취소가 아예 안 되는 티켓이었다. 덕분에 세 명의 티켓값을 아크로폴리스에 고스란히 기부했다. 이걸로 신전의 흙 한 줌은 쌓았기를.


출국 2일 전에는 레이오버하는 싱가폴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메일이 왔다. 우리가 결제한 신용카드에 문제가 있다면서 예약한 게 취소될 수 있다고 했다. 링크를 주고 여기에 접속해서 뭘 하라는데 링크가 xxx. xxxx 이런 식이어서 눌러지지도 않았다. 


출국 1일 전에는 그 사이트에서 다시 메일이 왔다. 우리는 그런 메일을 보내지 않는다, 그 링크에 접속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도 보이스피싱 같은 게 있다니. 이런 일 때문에 링크가 모두 xxx. xxxx 이렇게 처리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영 찝찝해서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하고 싶었지만 취소 수수료가 92%였다.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8%를 돌려준다는 게 더 킹받는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와중에 나는 9월까지 마감인 원고를 제출하고 가야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출국 당일에는 모든 원고를 마감하고 세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공항으로 갔다.






마냥 평화로워보이지만 몇 초 안에 기절할 것 같은 상태였다.


그와중에 3년, 혹은 4년 만에 본 공항이 너무 생경했다.


해외여행 중에는 늘 이 순간의 기분이 제일 기묘하다. 모든 게 완전히 낯선 곳에 떨어져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아무것도 모를 때. 내가 아는 곳에 발을 딛고 있는 마지막 순간.





목베개까지 장착하고 잘 준비를 마친 채 드디어 탑승.


비행기에서는 당연히 내내 잤다. 영화 한 편 보고, 기내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 싱가폴 항공 기내식 맛있다. 특히 후식으로 붕어싸만코를 준다. 내 옆에 앉은 외국인 아저씨가 사양할 때는 내가 다 안타까웠다. 한 번만 잡솨봐….






나의 두 번째 노숙.


싱가폴의 창이 공항은 노숙하기에 제일 쉬운 레벨이다. 어디든지 푹 쉴 수 있는 소파가 있고 24시간 하는 푸드코트도 널려 있다. 덕분에 야식도 든든하게 먹었다.


전세계 관광객이 다 몰리는 곳이어서인지, 다행히 유로로도 계산이 가능했다. 유로를 내면 싱가폴 달러로 거슬러주는 재미있는 시스템이었다.

 

누들도 맛있었지만 내 입맛에는 카야 토스트가 딱이었다. 바삭하고 고소하고 달달했다. 야쿤은 아니지만 헤븐리 왕이라는 곳인데 근처에 야쿤이 없다면 여기서라도 먹어보길.






쪽잠을 자고 환승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


왼쪽은 이번 여행에서 운전과 총무를 맡아준 툰이다. 고딩이랑 수학여행 가는 체육 선생님인 줄.


뒤에서 사진을 촬영해준 사람은 운전보조와 길 찾기, 숙소 예약과 소통 등을 담당해준 도아다. 아래에 나오는 마지막 사진을 제외하고는 이 글의 모든 사진이 도아가 찍은 사진이다. 내가 찍은 사진은 영영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환승하는 비행기는 싱가폴 항공과 공동운항하는 스쿠트 항공이었다. 여기는 좀 악명이 높은 저가항공사라 걱정이 많았는데 우리는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그렇게 맛없다던 기내식도 싹싹 긁어먹었고, 특히 초콜릿 아이스크림! 도아가 안 먹어서 내가 두 개를 먹는 행운을 얻었다. 


이때는 11시간이나 타는데 모니터도 없어서 내내 자기만 했다. 자다자다 일어나도 갈 길이 멀어서 끔찍하게 지루했다. 그런데 이때를 생각하면 그 달콤한 초콜릿 아이스크림의 맛이 먼저 떠오른다.




그나마 이 사진은 친구들에게 보내놓은 덕에 건질 수 있었다.


이 여행은 분명히 시작부터 험난했다. 


프라하에서 그리스로 행선지를 바꾸고, 그리스의 섬에서는 렌트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들으면서 도아의 지인인 툰이 운전자로 갑작스레 동행하게 되었다. 툰은 도아를 통해서만 알았고 여전히 그가 낯선 타인이었던 나는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이 셋이 해외를 2주 동안 다닌다는 사실이 가끔 아득하곤 했다.


그보다 더 큰 걱정은 도아였다. 툰은 일회성 여행 메이트일 뿐 다녀오고 나면 다시 남이지만 도아는 가장 친한 동기 중 하나니까. 친구 사이에는 해외여행을 가면 보통 어떤 일로 싸울까? 우리는 출국 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그럴수록 나는 우리가 싸울 것 같지 않았다. 도아는 타인과 싸우느니 자신이 참고 마는 성향이어서였다. 나는 도아가 뭔가를 참았다는 걸 영영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고, 그게 가장 걱정이 됐다. 사실 그건 지금도 걱정된다.


그 걱정과 불안 속에서 어쨌든 우리는 다녀왔다.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지금 그 2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수많은 길이다.


젤라또를 먹으면서, 도아의 캠코더를 찍으면서,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면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걷던 활기찬 도심과 조용한 골목길. 


너무 빨리 바뀌는 신호등에 황당해하면서 냅다 뛰기도 하고, 한밤중에 복면 쓴 사람들이 뛰어다녀서 서둘러 숙소로 돌아간 적도 있지만 나는 길을 걸을 때 대체로 즐거웠다. 어딘가에 머무르다 또 새로운 길을 걸어갈 때. 혹은 어느덧 돌아온 길이 눈에 익어서 내가 이곳에 익숙해졌다 싶을 때.



그러나 초콜릿 아이스크림은 혀에서 녹아 없어진지 오래고, 그 예쁜 골목길도 언젠가는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일단은 이때의 기억을 붙잡기 위해서 이 여행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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