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폴리스 > 모나스트라키 > 필로파포스
아테네에서 맞는 첫 아침.
시차 적응이 덜 되어서 좋은 점은 아침잠이 많은 나도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거다.
알고 보니 이 숙소에서는 각자의 방에서 아크로폴리스를 볼 수 있었다. 모노스가 하루 더 있었다면 저 테이블에 앉아서 초코우유 한 잔 마시며 노을을 봤겠지만… 그러려면 아마 아테네에만 일주일을 있어야 했겠지.
전날 사왔던 빵으로 아침식사. 바클라바, 브라우니 다 맛있지만 저 아이스크림 콘처럼 생긴 게 증말증말 맛있다!
이날은 9월 마지막 주말로, 아크로폴리스를 무료 개방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이날 가게 될 줄을 모르고 입장권을 예매해놨으나… 이하 생략.
아크로폴리스는, 특히 무료 개방하는 날은 오픈 런을 하면 그나마 덜 붐빈다고 해서 개장 시간인 여덟 시에 맞춰서 나갔다.
여덟 시에 맞춰 가도 줄이 어마무시하게 길긴 했지만, 결제 과정 없이 인원 수대로 티켓을 내주기만 해서 유료 개방 때보다 훨씬 빨리 줄어드는 듯했다. 그리스스러운 티켓을 받아서 입장.
가장 먼저 본 건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
원래는 여기서 공연도 볼 예정이었는데 희한하게 한국에서는 예매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테네에 도착해서 예매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는데, 와서 하려니 저렴한 자리는 전부 매진이었다. 이곳에서 공연을 보는 게 버킷리스트라면 아테네를 마지막 도시로 끼워넣는 것도 방법이겠다.
저때까지만 해도 구린 화질로 열일했던 플립2….
아크로폴리스의 상징, 파르테논 신전.
여기까지 올라가면 이제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그래도 우리는 사람이 없는 자리만 찾으면 여기! 여기 서봐! 했지.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지?
어떻게 지금까지 이런 걸 보존했지?
사람은 이상하고 신기하다.
아니 안 그래도 도아가 나보다 큰데… 도아 쪽에서 우리의 사진을 찍어준 툰….
그래… 뭐 어때요.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다 같이 행복했다.
오전 열 시에 가까워지자 사람도 점점 늘고 무엇보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졌다. 그늘막 하나 없는 너무 높은 곳이어서인지 그 햇빛이 다이렉트로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느낌이 들어 이만 내려왔다.
내려가는 길에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서 무언가를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가운데서 이 고양이가 레드카펫의 셀럽처럼 도도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스에는 어디에나 고양이가 넘쳐나는데, 신기하게도 고양이들마다 각자 자기에게 어울리는 곳에 있다. 신전에 있던 고양이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신전을 지키는 모양새로 비장할 리 없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가 생각 나는 길.
이 나무가 올리브 나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렁설렁 걸어서 시내로 내려왔다.
순전히 우연이지만 이 사진의 색감이 재밌다.
왼쪽 노란 건물들과 오른쪽 분홍색 건물들의 색깔이 각자 옷에서 번져나간 것처럼 보인다.
로마 포룸에도 들렀다.
대리석에 녹아드는 중.
이런 곳을 보면 또 스위스 같다.
(스위스 안 가봄)
모나스트라키 광장을 둘러보다 마그넷을 샀다.
종교는 없지만 여행지에서 성당이나 교회가 보이면 종종 들어가본다. 밖은 번잡하고 시끄러워도 이곳만은 조용하다.
배는 고픈데 식당이 열기 전이라 젤라또부터 먹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에 쿠키 콘 조합 최고. 그러니까 시꺼먼 아이스크림이 내 것이고 분홍색 알록달록 아이스크림이 툰의 것. 지금 생각하니까 웃긴다.
도아는 해외여행을 가면 h&m을 가본다고 한다. 마침 아이스크림 가게 옆에 h&m이 있어 오픈 시간이 되자마자 들어가보았다. 어쩜 이런 매장도 아테네다울까?
타인과 여행을 가면 이런 경험을 얻는다. 나는 원래 이런 곳에 가지 않는 사람이고, 그러니 혼자였다면 아테네가 담긴 h&m에 보지 못했을 거다.
도아는 여기서 모자를 샀는데, 그 모자를 여행에서 정말 잘 썼다.
점심은 모나스트라키 광장 쪽에서 먹었다. 문어와 양고기도 맛없을 수 없는 맛이었지만, 놀랍게도 아랫쪽의 쌀알 같은 파스타가 가장 맛있었다. 리조또처럼 보이지만 파스타고 아래에는 고기가 깔려 있다. 톡톡 튀는 식감이 독특해서 기억에 남는다.
그리스에서는 고기를 시키면 대부분 감자튀김이 사이드로 나온다. 그리고 그 모든 감자튀김이 다 맛있다. 기분 탓인지 감자 자체가 다른 것 같다. 그리스는 감자튀김 맛집이 맞다.
도아에게는 유럽에 왔으니 납작복숭아를 먹어보겠다는 소소한 로망이 있었다. 그러나 온갖 마트와 과일과게를 뒤져도 납작복숭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첫날 딱 한군데서 봤는데 대놓고 벌레가 꼬여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내 친구에게 그 납작복숭아를 먹게 해주겠어! 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납작복숭아 찾기 미션>은 나날이 광기를 더해가는데…
이날만 해도 겨우 2일차였으니 언젠가는 찾겠지,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무화과만 한 봉지 샀다.
너어무 덥고 너어무 목말라서 체리맛 콜라도 한 캔 사서 나눠마셨다.
이쯤 되어서 체력을 소진한 우리는 숙소에 들어가서 두어 시간 정도 쉬다가 나왔다.
전날 혼자 다녀온 필로파포스 언덕 사진을 보고 영업당한 동행인들 덕에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 재방문했다.
가는 길에 비슷한 장소에서 거북이를 또 만났다. 어제 내가 만났던 애의 친구나 가족이 아닐런지.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던 바위. 블라우스가 펄럭거리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좋은 곳은 또 와도 좋구나.
혼자 있을 때와 같이 있을 때가 달라서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사진만 보면 고독에 잠겨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마냥 즐거웠다. 그러면서 또 조용히 이 풍경을 바라볼 때도 있었다.
나는 웃고 떠들 때도 재밌었지만, 그런 순간들도 좋아했다. 아무런 대화도 필요하지 않은 찰나의 순간. 내가 보는 아름다움을 동행인들도 보고 있고, 지금은 그저 이걸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껴질 때.
여기서 보는 불 켜진 아크로폴리스도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아크로폴리스를 볼 수 있는 식당을 예약해놓아서 시간 맞춰 내려갔다. 여행할 땐 몸이 다섯 개쯤 되었으면 좋겠다.
아크로폴리스 뷰로 유명한 식당. 이 자리에 앉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예약했다.
여기는 뷰로만 유명하고 음식은 그냥 그렇다는 리뷰가 많았는데, 우리는 음식까지 너무 맛있었다. 특히 저 부라타치즈 샐러드와 양고기! 그리스는 양고기가 어딜 가나 맛있다. 감자튀김도 그렇다고 말한 것 같아서 머쓱하지만. 그리고 토마토! 토마토! 왜 우리나라 토마토는 저 맛이 안 나는 거야!
해가 저물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아크로폴리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과 눈이 너무 자주 마주쳤다. 고개만 돌리면 우리를 보고 있어서 시선을 내가 먼저 피할 정도였다. 동양인이어서인가 하기에는 그들 중 하나도 동양인(아마도 일본인)이었다.
나는 아마도 우리 자리를 탐내는 것 같다고 의견을 냈다. 그런데 이쪽을 쳐다보던 커플이 갑자기 싸우기 시작해서 좀 당황스러웠다. 왜 예약을 안 한 거냐고 싸우는 게 아닐까? 알아들을 수 없는 그리스어를 추측해보기도 했다.
결론. 이 식당에 갈 때는 꼭 예약하자. 아크로폴리스 뷰 테이블로, 가능하면 빨리.
여기가 그리스에서 먹은 식당 중 가장 비싼 곳이었다. 아마 80유로가 조금 넘게 나왔던 것 같은데, 툰이 계산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렌트카를 예약하고 돌아왔다.
평화롭게 소파와 체어에 늘어져 있다가 각자 방으로 돌아가 이 숙소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때 그저 빈둥거리던 나에게 한 마디를 전할 수 있다면….
푹 자, 다음날은 고생 좀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