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rgos > Santorini Sunset Cruise
새벽에 잠깐 깨서 외투만 걸치고 나왔다. 문을 등지고 왼쪽으로 바라보는 뷰. 나는 이 모습을 제일 좋아했다.
정면을 보니 하늘에 고양이가 떠 있었다. 몽실몽실한 고양이가 근엄하게 산토리니를 내려다보았다.
필카 기술을 +1 득템하였습니다.
저 그네는 한번도 못 타봤다.
어떻게 이런 돌을 올려놓을 생각을 했지.
쓰지는 않았던 2층의 부엌. 저 창문 너머에는 카페 야외석이 있는데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과 자꾸 눈이 마주쳐 곤란했다. 여기에는 귀여운 화분을 둘 게 아니라 블라인드를 치셨어야 하는 게 아닌지…
다시 자고 일어난 아침. 저 위에 있는 창문은 기린 정도나 되어야 열 수 있는 건가.
아침을 먹자는 카톡에 방을 나왔다. 시간대별로 다 다른 풍경.
이게 2층을 내가 썼던 이유다. 계단 공포증이 있는 도아는 체크인을 할 때 한 번 올라와보고 여길 다시 오는 걸 포기했다. 나도 이날 아침 멍하게 발을 내딛다가 불현듯 사고나겠다 싶어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두어 시간 뒤 정말로 그 사고가 일어나고 마는데…
낙소스에서 샀던 꿀을 요거트에 넣어서 먹어보았다. 맛없을 수 없는 조합.
열쇠 아래에 깔린 알약은 내가 상비로 가지고 다녔던 멀티비타민. 나만 먹을 수 없어서 동행인들에게도 늘 강제로 쥐어주었다. 도아는 절레절레 귀찮아하면서도 결국 매일 다 먹었다. 그래도 그게 우리의 체력에 몇 프로라도… 기여했을 거라고 생각해…
한국인들이 휩쓸고 간 자리.
기린이 아니면 못 여는 창문 여기도 있다.
아직은 그때의 기분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아무 고민도, 불안도 없었던 건 절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런데 이런 사진들을 보면 그저 평온하기만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걸지도 모르겠다. 행복해 보이는 순간들을 남기려고.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해도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는 이 사진들로 과거를 기억하게 될 테니까.
자 그래서 여기서도 이렇게 도아와 사진을 찍으며 놀고 있었는데 말이지…
(이 노랑&하늘 조합 이모지를 찾아내고 어머어머 찰떡이야 하며 썼다)
뭐 때문이었는지 툰이 2층에 올라갔었는데, 계단 위쪽에서부터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도아의 어, 어! 어! 하고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분명 2층에 있었던 툰이 맨 아랫계단까지 내려와 있었다. 앉은 자세로.
이 아름답고 가파른 계단이 결국 일을 쳤다. 크로스백을 앞으로 맨 채여서 발 밑을 못 보고 내려오느라 첫 계단에서부터 헛디딘 거였다. 그나마 툰의 체격이니 안정적으로 굴러내려온… 거지, 나나 도아였다면 그날 일정을 다 접고 병원이나 가야 했을 정도의 사고였다.
팔뚝이 군데군데 까졌기에 연고라도 바르고 가자고 했는데 그냥 가자는 쿨한 사나이를 따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숙소를 나섰다.
렌트를 예약한 회사에서 카드 결제에 실패했다고 해서 사무실로 찾아갔다. 비자인가 마스터인가 둘 중에 하나가 유럽에서 결제가 안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하니 애시당초 현금으로 결제해버리는 게 더 편할 것 같다. 현금으로 결제하고 나오는 길에 발견한 귀여운 풍차.
…를 찍는 나를 찍어주는 너.
다시 숙소가 위치한 동네로 돌아왔다. 이날의 메인 일정은 선셋 크루즈 타기인데, 그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동네를 돌아보기로 했다.
이 동네는 피르고스. 산토리니의 대표 관광지는 이아마을과 피라마을이지만 그곳은 신혼부부용 숙소가 대부분이라 차선책으로 이곳을 택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동네다.
이곳은 작은 슈퍼에서도 마그넷을 파는데, 나와 도아 둘 다 마음에 드는 마그넷을 발견했지만 가격이 비교적 셌다. 일단 다른 데를 더 보고 오자며 나가려다 도아가 마그넷 하나를 깨뜨렸다. 사과를 드리며 돈을 지불하려는데 아주머니가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유교걸들은 또 이런 따스함 못 참지. 고민했던 마그넷을 둘 다 바로 사 버렸다.
(나에게는) 관념적 170cm.
우리 숙소로 가는 길. 항상 숙소 가기에 바빠서 제대로 못 본 길이었다.
이아마을처럼 하얀 페인트를 냅다 때려부은 느낌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적당히 때가 타고 칠이 벗겨진 건물들도 좋았다. 이것 또한 산토리니니까.
깨질 걱정만 안 들었어도… 하나쯤 집어오고 싶었던 도자기.
이제 크루즈를 타러 간다.
우리가 2박 3일 동안 타고 다닌 차. 업체는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색깔 하나는 산토리니와 어울려서 좋았다.
선셋 크루즈의 출발지는 블리차다 항구. 이십 명쯤 되는 인원과 크루즈에 동승했다.
이 먹구름 때문에 날씨를 좀 걱정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는데 대신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 크루즈가 심하게 출렁거려 그냥 누워 있는 게 나았다. 조금씩 잦아들면 한 번씩 일어나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상념에 젖은 뒷모습… 같지만 그저 바닷바람에 뺨따귀를 맞고 있는 중.
산토리니의 유명한 관광 아이템 중 하나가 크루즈여서 다른 크루즈와도 많이 마주쳤다. 인생에서 다시 없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한날 한 시간에 같은 바다에 같이 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도아와 툰이 각각의 창문에 들어가 있었다. 도아가 찍고 있는 툰은 수영복을 입은 차림이라 초상권 보호 차원에서 잘라드렸다.
조물주님 학교 숙제로 솜 뭉쳐서 구름 만들기 하셨나요?
파도가 심하긴 했는지 도아는 결국 멀미 직전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크루즈 스탭이 레몬이 담긴 얼음물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게 나름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몇 모금 마신 도아는 베드에 기대앉아 푹 잤다. 나와 툰은 과자를 까먹으며 노가리를 깠다. 이때도 뭐 되게 웃긴 얘기했는데 기억이 정말 안 나네…
도아가 잠든 순간을 캠으로 찍으면서 노가리 까는 이야기를 asmr로 담았으면 재밌었을 텐데. 여행할 때도 내내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후회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다녀오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도아는 거짓말 같이 멀미 기운이 싹 가셨다.
레드 비치, 화이트 비치, 블랙 비치 등 여러 비치를 지나면서 바다의 색깔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물은 정말 신기하다. 아무 색이 없는 존재가 어떻게 이렇게 예쁜 색을 만드는지.
크루즈는 중간중간 멈춰서 수영을 하게 해 줬는데, 툰은 물 만난 물개처럼 신나게 수영을 했다. 우리는 툰이 찍어온 영상을 보면서 부러워했다. 특히 스노쿨링을 할 때가 정말 부러웠다. 이 바다에 완전히 들어가 물고기들 틈에서 헤엄친다는 건 무슨 기분일까?
이걸 찍고 있으니까 툰이 이런 건 왜 찍냐고 물어봤다. 나는 도아는 왜 찍는지 알 거라고 대답했다. 수영만 알고 갬성을 모르는 아저씨.
보기엔 얕아보이지만 직접 들어간 툰의 말로는 4m 정도 된다고 한다. 바닷물이 4m 아래의 바닥까지 훤히 비칠 정도로 맑다니.
非물개는 나홀로 타이타닉 타임이나 가져본다.
현실은 사진이나 찍고 있었지만.
이런 사진 안 찍을 수는 없잖아.
드디어 식사타임. 스탭이 이 비비큐를 너무 맛깔나게 굽고 있어서 계속 흘끗거리던 참이었다. 과연 이 비비큐가 제일 맛있었다. 스파게티는 보이는 대로 딱 급식 스파게티맛.
모두가 식사를 마쳤을 때 스탭이 남은 음식물을 모아서 바다에 버렸다. 너무 환경오염 아니야!? 하려던 찰나 새떼가 몰려와 디너 서바이벌을 치렀다. 저 많은 새가 다 어디 있다가 한번에 몰려온 건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도 밥을 먹고 새도 밥을 먹고 이제 바다를 감상하는 시간.
여기 앉을 때는 몰랐는데 뜻밖에도 우리가 앉은 곳이 노을을 보는 명당 자리였다. 스탭이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 자리에서 어느 커플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사진까지 찍어줬지만… 바람에 머리가 산발인 너무 날것이라 생략한다.
지금 발견했는데, 새들이 유체이탈하고 있는 것처럼 찍히는 건 왜일까?
퇴근 준비하는 태양.
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그곳의 노을을 보는 게 일종의 루틴인데, 그러다보니 다양한 곳에서 노을을 봤다. 대부분 노을을 보는 스팟이라고 하면 그만큼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어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텅 빈 섬 같았던 낙소스에서조차 아폴론 신전만큼은 사람이 많을 정도였으니까.
이때는 크루즈에 탄 모든 사람들이 고요히 노을을 바라보았다. 와인을 흘리며 떠들던 이십대 남자애들도. 자꾸 뭔가를 잃어버려 크루즈 안을 헤집고 다니던 여자도. 아빠에게 성질을 부리고 엄마에게만 안기던 꼬마 아이도. 멀미에서 겨우 벗어난 도아도, 바닷물이 짜고 춥다며 투덜거리던 툰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크루즈의 크기에 비해서 사람이 너무 많다고 속으로 불평하고 있었던 나도.
이렇게 온갖 나라의 다 다른 사람들이 한 곳을 말없이 바라본 단 한 순간이었다. 이 세상에 그외에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때는 정말 그랬다. 이 노을을 보는 것만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른 번잡스러운 생각은 모두 하찮고 쓸모없었다.
이때가 나에게는 그리스에서의 최고의 순간이다.
크루즈는 다시 출발지로 돌아왔다. 우리를 뒤따라오며 퇴근하는 크루즈들이 어딘가 모르게 귀여웠다.
옹기종기 모인 크루즈들.
이걸 광각이라고 하나…? 아무튼 툰의 폰 카메라는 이런 느낌이라 나와 도아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당장이라도 바다에 빨려들어갈 것 같은 느낌…
이런 고즈넉한 풍경도 얼마나 좋은지.
크루즈에서 먹은 게 저녁이었지만 우리는 시간이 애매해서 점심을 걸렀기 때문에 우리만의 저녁을 또 먹으러 왔다. 평점이 높고 웨이팅이 심하다는 말이 많아서 걱정했지만 딱 십 분 정도를 기다리고 들어갔다. 우리 뒤부터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오죽하면 계산할 때 그리스 식당 대부분이 계산서를 가져다주고 돈을 받으러 나중에 다시 오는데 직원이 우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기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울고 있어서 카운터에서 계산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우리는 늘 그리스 방식의 계산이 답답했기 때문에 잘된 일이었다.
야경이 바로 보이는 담벼락 쪽의 자리로 받는 행운을 얻었는데, 이 담벼락 위로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다녔다. 그리스 고양이들이 대체로 개냥이들이긴 하지만 이 녀석은 남달랐다. 좀 쓰다듬어주니 내 무릎까지 올라왔다.
여기는 음식 맛이 아니라 고양이밖에 생각이 안 나네…
나에게 무릎집사 체험을 시켜준 아이.
툰은 얘가 우리 식사를 노리는 거라고 했지만 난 이 아이가 추워서 그러는 거라며 너 춥지??? 너 추워서 그러는 거야, 라고 추위라이팅을 했다. 이 아이는 도아의 무릎에도 올라갔다가 우리가 끝내 음식을 주지 않으니 다른 테이블에 가 버렸다.
그래도 잠시나마 너를 쓰다듬으며 행복했어.
이 차디찬 계절을 무사히 보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