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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원 Mar 15. 2023

원샷! 원샷! 원샷!

소주 한 병을 한숨에 들이키는 것을 눈앞에서 본 적이 있는가? 한 잔이 아니라, 한 병 말이다. 나는 봤다. 2005년 2월, 2박 3일간 열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새내기 새로배움터’ 행사에서 말이다. 당시에는, 먼 옛날도 아니지만, 아직 구세대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같은 학번 학생들이면 재수를 하고 들어온 형이 있어도 형이라고 존대해서 부르면 안되고 ‘~~야'하고 동년배처럼 불러야만 했었다. 그래야 한 학번 위 선배가 아래 학번 재수생를 쉽게 서열로 제압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생긴 문화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남아있는 오래된 문화들 중에 하나가 지독했던 술문화였다.


새내기 새로배움터에서 학교에 갓 입학한 학생들이 배운 건 뭐였을까? 기억이 나는게 거의 없지만, 하나 분명하게 배운 건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또 서로 술을 먹이면서 자연스럽게 단합된다는 것이었다. 2박 3일간의 새터 일정 중에서 적어도 6-70퍼센트의 시간에 우리는 학과 대항전으로, 과내 조별 대항전으로 술게임을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소주 원샷 배틀이었는데, 마치 삼국지에서 각 나라의 장수들이 한 명 씩 나와 나라를 대표해 벌이는 일기토 장면과 비슷했다. 소주 원샷 배틀은 각 과를 대표해서 한 명의 술꾼이 나와 일대일로 누가 소주 한 병을 빨리 비우나 대결을 벌이는 것이었는데, 일기토에서 한 장수가 죽으면 그 나라가 전투에서 패배했던 것처럼 소주 한 병을 늦게 비우는 쪽이 30병의 소주를 벌칙으로 다같이 마셔야만 하는 결투였다. 

한 번은 우리 기계과와 화학공학과가 이 배틀을 붙게 되었다. 기계과를 대표했던 선배는 삼국지의 장비처럼 덩치가 큰 야수같은 스타일이었고, 상대 화공과 대표는 마른 체형의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반적인 공대생이었다. “삐~~~~” 하는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소주 한 병씩을 벌컥벌컥 들이키자, 이를 지켜보는 수십여명의 과 학생들은 각자 대표의 이름을 연호하며 응원을 했다. 화공과 대표가 술의 독기를 참지 못하고 ‘푸흡' 한 번 뱉어내고 쉬어갈 틈에, 삼국지 속 장비 같았던 우리 과 대표 형은 멈추지 않고 단숨에 소주 한 병을 비워 버렸다. 그러자 우리과 사람들은 흥분해서 환호성을 질러대다가 이내 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원 샷! 원 샷! 원 샷!” 마치 원시부족이 다같이 호랑이라도 사냥해온 것 마냥 우리는 하나가 되어 선배의 경이로운 소주 한 병 “원 샷”을 기리며 승리를 함께 만끽했다.

이렇게 술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단합의 힘을 목도한 새터였지만, 사실 나는 이 2박 3일이 심리적으로 너무나도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 광란의 술파티 가운데서 내가 술을 한방울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믿기 힘들겠지만, 그 당시에 나는 기독교 신앙에 깊이 심취해 있어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술마시는 기계라고 불리던 이 기계과 동기들과 선배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형제애를 키워가고 있을 때, 나는 내게 잔이 올 때마다 “저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라고 답하곤 했다. 하루는 윗학번 선배가 “임마, 나는 어제 교회에서 필리핀 단기 선교 갔다가 왔는데도 마시는데, 너는 뭐가 잘났다고 버티냐”고 핀잔을 줬다. 선배의 한마디에 그 자리는 찬물을 끼얹은 것 마냥 조용해졌고, 그곳에 있던 수십개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나를 향했다. 지금이라면 뭐라고 한마디 쏘아 붙였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럴 용기도 번뜩이는 재치도 없었다. 그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식은땀을 느끼며, 어색한 공기를 견뎌내는 수밖에. 


다행이었던건 그래도 새터 같은 조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나를 많이 배려해줬다는 것이다. 같은 학번 현도와 선배인 준영이 형이 특히 나를 많이 도와줬는데, 어쩔 수 없이 우리 조가 술을 마셔야할 때는 슬그머니 돌아가며 내 몫까지 같이 마셔주곤 했었다. 나 또한 게임에서 승리해 최대한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했는데, 결국 우리 조는 이틀 동안 치러진 모든 조별 게임에서 한 번도 지지 않은 유일한 팀이 되었다. 이건 어쩌면 우리에게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미 소주 몇 병씩 마시고 어지러울 때,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전력을 다해 게임에 임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새터 같은 조에서 술게임 도장 깨기로 인연을 시작한 현도와 준영이 형은 대학생활과 그 이후의 십수년의 시간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와 선배로 지내고 있다.

새터가 끝나고 본격적인 1학년 생활이 시작되면서, 술을 마시지 않던 나는 아싸(아웃사이더)로 남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왠일인지 동기 친구들은 나를 계속 술자리에 불렀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됐다. ‘얘네들이 왜 나를 껴주지? 내가 재밌는 사람이라 그런가? 하하하!' Nope. 나는 웃기는 캐릭터가 결코 아니었다. 알고보니 대학교 1학년들이라 다들 술 조절 없이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기 일쑤여서, 마지막에 자신들을 지켜줄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친구들이 나를 술자리에 불러주는 건 내게 동기들과 어울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저곳 불려다니며 친구들을 안전하게 집에 보내다주면서 자연스럽게 동기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야, 니가 어제 갑자기 자빠져 자기 시작해가지고 완전 분위기 깨졌잖아!” “뭔 소리야, 화장실에서 변기 끌어안고 잠들어 있던 게 누군데, 기억 하나도 안나지? 진원이한테 물어볼까? 진원아!” 그렇다, 멀쩡한 정신 덕분에 가끔은 전날 일어난 잔잔한 사고들의 진위를 가리는 최후의 심판자가 되어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2005년 봄, 술마시는 기계들 사이에서 나의 대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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