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중심축만 흔들리지 않는다면ᆢ
십 년째인가 보다.
딸과 자주 부딪힌 시기가 십 년이 되어가는 듯하다..
사춘기라는 말로 포장하기엔, 내가 낳은 자식의 달라진 모습이 낯설고 서운하다. 나긋하게 건넨 말에도 날카롭게 반응하고, 예전처럼 함께 웃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 그 한마디에 나는 무력해진다.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며 아이를 내 방식대로만 이해하려 했던 걸까.
오래전 책장 깊숙이 꽂아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문득 떠올랐다. 대학 시절, 혼란과 외로움 속에서 이 책을 읽으며 위로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싱클레어에게 공감했지만, 이번엔 ‘엄마’의 시선으로 다시 책장을 넘겼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선하고 안정된 세계에서 출발하지만, 점차 어두운 욕망과 진실을 마주하며 혼란에 빠진다. 그는 점점 기존의 규칙과 도덕에 의문을 품고, 자신만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나는 이 싱클레어의 모습에서 지금의 딸을 보았다. 딸도 지금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아프고,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싸움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예전의 ‘순한 아이’로 돌아오길 바랐던 건 아닐까.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말한다.
남이 정한 선과 악에 휘둘리지 말고, 네 안의 소리를 따라가라.
그 말은 부모의 기대, 사회의 기준을 벗어나 자신만의 진실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랬다.
딸에게 무언의 기준을 강요해왔는지도 모른다. 좋은 성적, 착한 말투, 바른 생활. 내가 정한 ‘괜찮은 아이’의 기준 속에 그녀를 가두려 했던 것 같다.
책을 덮고 나서 딸의 방 앞에 서보았다.
문을 열지는 못했다. 대신 마음속으로 말했다. 미안해. 너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사춘기란, 외롭고 아픈 길이지만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기다. 내가 할 일은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길 끝에서 언제든 돌아볼 수 있는 ‘등불’ 같은 존재가 되어주는 것이다.
『데미안』은 아이를 이해하려는 내 마음에 조용한 울림을 주었다. 딸이 겪는 복잡한 감정을 존중하고, 내 방식이 아닌 그녀만의 리듬을 믿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도 딸과 마주할 때마다,
‘엄마의 말’이 아니라 ‘엄마의 귀’를 먼저 열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