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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어머니에 대한 기억 ④고봉(高捧)밥과 누룽지

by 박인권

어머니에 대한 기억 ④고봉(高捧)밥과 누룽지


#고봉(高捧)밥의 추억

고봉(高捧)밥은 밥그릇 위로 수북하게 쌓은 밥을 말한다. 고봉밥을 담는 밥그릇은 요즘에는 보기 힘들다. 그릇의 용적(容積)이 깊고 넓어 밥공기의 두 배쯤 되는데, 제사상에 올리는 밥그릇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어머니는 갓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을 고봉으로 꾹꾹 눌러 퍼 밥상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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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봉밥은 차례상에서나 볼 수 있다. 병풍 바로 앞에 고봉밥 두 그릇이 보인다. ⓒPARK IN KWON


처음에 우리 집 고봉밥 그릇은 놋쇠로 만든 놋그릇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스테인리스 그릇으로 바뀌었다. 놋쇠로 만든 놋그릇은 무겁고 중후한 모양새가 그럴듯하지만, 윤이 나게 닦아주지 않으면 녹이 슬어 관리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놋그릇에 비해 스테인리스 그릇은 가볍고 반짝반짝 광(光)이 나는 데다 쉽게 녹슬지 않는 장점이 있어 밥그릇 문화에 일대 변화를 불러온 획기적인 상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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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짓고 난 뒤 곧바로 주걱으로 긁어낸 누룽지는 부드러운 식감이 난다. ⓒJudgefloro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고봉밥의 유래(由來)는 먹을 것이 변변찮아 반찬이 시원찮았던 시절에 밥심으로라도 버티라고 밥을 산처럼 높게 쌓아 퍼담은 데서 비롯됐다. 밥을 남기면 혼나던 때라 나나, 형들이나 고봉밥을 거짓말처럼 깨끗이 비우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밥그릇이 요즘 밥공기보다 두 배 이상 큰 데다 밥주걱으로 꽉꽉 눌러 펐기에 지금 기준으로 거의 3인분 분량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마 밥그릇의 크기에 맞춰 밥 배도 커진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다.

희한한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밥을 먹었는데도 금방 배가 꺼진다는 점이다. 고기나 생선 반찬이 귀하고, 채식(菜食) 위주의 식단(食單) 때문이라 짐작된다.


요즘에야 끼니때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 또는 생선을 맛볼 수 있지만, 그때는 어쩌다 한 번이거나 특별한 날에만 밥상에 오르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나마 생선구이나 생선조림은 나은 편이었고, 값비싼 불고기가 나온 날에는 우리 형제 모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고봉밥을 싹 비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딱히 메인 음식이라고 할 게 없는 날, 어머니는 큼지막한 양푼에다 네 식구 밥과 나물 반찬을 다 쓸어 담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듬뿍 넣어 비빔밥을 만들었는데, 빙 둘러앉아 숟가락으로 한 술, 한 술 퍼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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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용 솥 밥으로 만든 눌은밥. 눌은밥은 숭늉의 다른 표현인데 솥에 눌은 누룽지 위에 뜨거운 물을 부어 밥알과 함께 먹는 식후 음식이다. ⓒroland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누룽지의 추억

무쇠 밥솥에는 전기밥솥이나 압력밥솥에는 없는 장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누룽지다. 무쇠 밥솥으로 밥을 지은 뒤 밥을 다 퍼내고 나면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 눌은밥이 보이는데 그게 누룽지다. 누룽지는 불을 때는 시간과 불의 강약 조절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스테이크 구울 때 사용하는 용어를 억지로 차용(借用)한다면 웰던(well done), 미디엄(medium), 래어(rare)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겠다.


밥을 다 퍼낸 다음에 센 불로 제법 오래 솥을 달구는 웰던 방식은 누룽지 밑부분이 까맣게 타고 충분히 눌어 씹히는 식감이 매력적이다. 뭉근한 불로 살짝 달궜다가 솥을 덜어내면 완성되는 미디엄 누룽지는 딱딱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보통의 식감이 난다.


약한 불로 은근하게 잠깐 데워 덜어내거나 밥을 다 짓고 바로 주걱으로 긁어낸 래어 누룽지는 밥을 씹을 때와 거의 차이가 없는 부드러운 느낌이다. 세 종류의 누룽지 모두 고소하고 구수한 풍미(風味)가 진해 푸근하게 입맛을 당긴다. 고소하고 구수한 맛은 누룽지 고유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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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싹 말린 누룽지. ⓒPARK IN KWON


#숭늉과 누룽지탕

누룽지를 다른 방식으로도 먹었다. 밥을 다 퍼낸 뒤 솥 바닥에 눌어붙은 눌은밥 위에 물을 붓고 끓이면 밥알이 흐물흐물하게 풀린 거친 미음(米飮)처럼 되는데 그게 숭늉이다. 숭늉은 끓는 물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눌은밥에서 우러난 구수한 맛이 일품이고, 포만감에 더부룩한 뱃속을 평화롭게 누그러뜨리는 데에 도움이 돼, 식후 디저트로 마시거나 입맛이 없을 때 먹기에 편했다. 아버지는 식사를 마친 후 꼭 숭늉을 찾았다.


눌은밥을 박박 긁어모아 대나무 소쿠리에 펼쳐 말린 마른 누룽지는 간식(間食)으로 즐겨 먹었다. 어릴 때 누룽지는 어머니표 별미 간식, 군것질거리였다. 먹고 남은 누룽지는 상온에서 바싹 말려 흰 설탕을 뿌려 간식으로 먹거나, 물을 붓고 끓여 누룽지탕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펄펄 끓은 누룽지탕을 바로 먹기에는 너무 뜨거워 찬물을 부어 식힌 뒤 먹곤 했는데, 요즘도 한 번씩 옛날 방식을 재현하면서 추억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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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숭늉.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누룽지를 지극히 사랑하는 가정에서는 말린 누룽지를 뻥튀기 장수에게 가져가 누룽지 뻥튀기로 만들어 심심풀이 간식으로 즐겨 먹었다. 우리 집에서도 가끔 뻥튀기 장수에게 누룽지를 맡겼다.


숭늉을 정식 메뉴로 발전시킨 누룽지탕은 중국집의 정식 요리로도 인기가 높다. 중국식 누룽지탕은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1711~1799, 재위 1735~1796) 때 유래됐다는 설(設)이 있다. 우리처럼 쌀을 주식(主食)으로 하는 나라에서는 모두 누룽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눌은밥이 사라진 압력밥솥 시대인 요즘, 마트에서 파는 말린 누룽지를 사다가 물을 붓고 끓여 먹으면 입맛도 살아나고 옛날 생각도 난다. 무쇠 밥솥 시대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누룽지의 힘은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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