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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어머니에 대한 기억 ⑧어머니와의 이별(上)

by 박인권

어머니에 대한 기억 ⑧어머니와의 이별 (上)


#장남(長男)의 빈자리

2004년 여름은 어머니에게 잔인했다. 그해 7월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장남의 빈자리는 어머니 가슴에 비수(匕首) 같은 멍에로 슬프게 새겨졌다. 큰형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장남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잦아졌다.


어머니는 결혼하고 5년 만에 어렵사리 첫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큰형이었다. 그때는 결혼한 여자면 누구나 아기가 들어서기를 오매불망 학수고대(鶴首苦待)하던 시절이라, 어머니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봉건적 사고에 젖은 시어머니의 눈총과 다섯이나 되는 시누이들의 불편한 곁눈질을 꿋꿋하게 참아내며 마침내 득남(得男)으로 그간의 가슴앓이를 씻어낸 어머니는 보란 듯, 둘째와 셋째를 연거푸 득남하면서 드센 시집살이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23살에 첫아기를 얻은 어머니에게 맏아들의 존재는 특별했다. 어릴 때, 유달리 잔병치레에 시달린 큰형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은 늘 애잔했고, 그 애잔함은 큰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아, 돌아올 수 없는 슬픔의 바다를 건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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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이 세상을 떠나고 1년이 지난 2005년 여름 경북 청도 운문사를 찾았을 때의 어머니 모습.


#앞산 중턱의 은적사(隱跡寺)

원치 않은 큰형의 빈자리가 생긴 이후, 어머니는 집 근처 사찰을 찾는 일이 많아졌고, 홀로 소리 내어 불경(佛經)을 읽는 경우도 많아졌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코흘리개 때부터 나는 어머니를 따라 대구 앞산 자락의 천년 사찰 은적사(隱跡寺)를 여러 번 갔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앞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내려 도보(徒步)로 30분 거리의 은적사는 고려 태조 왕건(877~943, 재위 918~943)의 지시에 따라 926년에 창건된 고찰(古刹)이다.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다는 은적(隱跡), 이라는 절 이름은 후백제의 견훤과 후삼국 시대 패권을 놓고 다툰 대구 팔공산 일대 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비슬산의 굴로 피신한 데서 유래됐다. 앞산은 비슬산에서 뻗어 나온 대구시 남쪽에 있는 산인데, 집 앞에 서면, 산이 보인다고 해서 앞산으로 불리게 됐다.


#한국불교대학 관음사(觀音寺)

큰형의 부재(不在), 즈음에 어머니는 산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은적사는 어쩌다 한 번씩 들렀다. 칠십 고개를 넘어선 고령(高齡)이라 힘에 부치기도 했고, 대명동 사거리 도로변에 자리해 다니기가 편리한 한국불교대학 관음사를 은적사 대신 자주 찾았다.


큰형의 장례가 끝난 뒤부터 내가 주기적인 의식처럼 치른 일이 있다. 만사 제쳐두고 두 달에 한 번은 꼭 대구에 내려가 이틀에서 사흘을 어머니 곁에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한국불교대학 관음사도 여러 번 가봤다. 7층 건물인 관음사는 법당이 3층에 있었다.


사찰로서는 드물게 자동차가 오가는 큰길에 붙어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고 쾌적하고 편리한 불공(佛供) 시설을 갖춘 데다 불교 교육기관이라 평일에도 불자(佛子)와 스님, 방문객들로 붐볐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관음사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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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 운문사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걷는 게 힘에 부치기 시작한 어머니

어머니는 70대 중반이 넘어서면서 허리 통증이 심해졌다. 나이가 들면 찾아오는 퇴행성 관절염이 원인인데, 뼈와 뼈 사이를 연결하는 물렁뼈인 연골(軟骨)의 탄력이 떨어져 손상되면서 허리 통증을 유발한 것이다. 무릎 연골에도 문제가 생긴 어머니는 한 번에 50m 이상 걷는 것을 힘들어했다. 척추 전문 병원에서 치료도 받았지만, 고령(高齡)이라 일시적인 효과에 그칠뿐, 곧 통증이 재발하곤 했었다.


무릎과 허리 통증은 직립보행(直立步行)을 하는 인간이 직립보행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다발적인 신체 기능 저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일상생활이 불편한 것은 물론 하체 근력이 쇠약해지면서 전반적인 운동량 감소로 이어져 결국 심장 기능이 약해진다. 노인들에게 심장질환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먼 거리를 걸을 수 없어 여행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고 바깥나들이에도 소극적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고 싶은 곳도 많고, 이름난 맛집을 찾아 사드리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허리 통증이 늘 발목을 잡았다. 궁리 끝에 팔순(八旬) 기념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 여행을 강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여행

2013년 여름, 우리 네 식구와 어머니, 다섯이 경기도 모 펜션으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교통편과 숙박, 식사 등 모든 동선(動線)을 허리가 불편한 어머니에게 맞춰 일정을 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간간이 당일 코스 여행은 다녔지만, 외부 숙식 여행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경기도의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에 자리한 펜션을 우리가 찾은 날은 평일이었다. 복잡한 인파(人波)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펜션은 복층 구조로 1층에 방이 3개, 2층에도 오픈 스타일로 널찍한 방 하나가 있었고 화장실도 2개였다. 6인 가족이 식사할 수 있는 대리석 식탁과 와인바도 갖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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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사용했던 안경.


무엇보다 내가 신경을 쓴 대목은 펜션 내부에 우리 가족만 이용할 수 있는 독립형 야외 수영장이 딸려 있다는 점이었다. 바다는 물론이고 수영장도 가 본 적 없는 어머니를 꼭 한 번 이런 곳에 모시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꽤 넓은 수영장에 가득 찬 물은 한낮의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푸르고 맑게 빛났다.


어머니는 수영장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 손으로 수영장 물을 휘저어 만져보는 것이 내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수영장 물과 처음 대면한 셈인데, 그때 어머니의 표정에서 싫지 않은 기색(氣色)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해거름이 되자 우리는 펜션 야외 테라스에 설치된 바비큐장에서 준비해 간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내가 어머니와 집도 아니고, 식당도 아닌 곳에서 고기를 먹은 기억은 아버지와 3형제 식구가 다 모인 90년대 초중반 때가 마지막이었다.


밤에, 나는 펜션에서 룸서비스로 내준 포도주를 어머니에게 조금 따라 드렸다. 어머니는 술을 못 드시지만, 그날은 한 모금 마셨다. 어머니는 시큼한 포도주를 삼키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큰형을, 우리 가족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날 어머니는 크게 웃고 옛날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여행은 짧았지만, 어머니도 즐거워했고 아들과 딸도, 집사람도, 나도 즐거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1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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