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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Sep 11. 2024

베이비 붐 세대의 주말 밥상 이야기

24. 비빔밥

24. 비빔밥


 #명절 차례(茶禮)에 대한 기억

 대구가 고향인 나는 어린 시절 명절 때마다 경북 상주(尙州) 큰아버지 댁을 찾았다. 부모님, 두 형들과 함께 차례(茶禮)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명절 전날 일찌감치 큰아버지 댁에 도착한 나는 형들과 상주 읍내의 극장에서 무협 영화를 보거나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동네 아이들과는 서로 이름도 성도 몰랐지만, 구슬치기나 딱지치기와 같은 동심(童心)의 상징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다리를 놓아 금세 친해졌다.      


명절 아침 제사는 두 번 치렀다. 먼저 두 대의 택시에 나눠 타고 증조부(曾祖父)의 장손(長孫) 집으로 향했다. 읍내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농촌 마을에 위치한 그곳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수십 명의 후손들로 시끌벅적했다. 낯익은 얼굴보다 낯선 얼굴이 훨씬 많아 누가 누군지 알 수도 없었지만 어른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고개를 숙여 인사하라고 아버지가 가르쳤다. 


증조부의 후손으로 3, 4대에 걸친 한집안의 피붙이 모두가 빠짐없이 모이는 날이 추석과 설, 차례를 지낼 때였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넓은 마당을 끼고 있는 초가(草家)집에 모인 후손 중 웃어른들은 안방과 대청마루에서, 형이나 내 또래의 아이들 스무 명 남짓은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절을 올렸다.      


일반적인 형태의 비빔밥


증조부의 장손 종백부(從伯父

증조부의 장손은 아버지의 사촌 형제 중 맏형으로 나에게는 5촌 당숙(堂叔)인데 한자로는 종백부(從伯父)라 부른다. 물론 당시에는 이런 호칭을 알 리가 없었고 1년에 두 번 잠시 얼굴만 볼 뿐이라 어렵게만 느껴졌다. 제사를 지낸 뒤면 어김없이 마당에 큰 상을 펴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증조부의 손자들이 낳은 자식들과 섞여 앉아 제삿밥을 먹었다. 


제삿밥은 비빔밥이었다. 뜨거운 탕(湯)국이 딸려 나왔고 차례상에 올린 제수(祭需) 음식 몇 가지도 눈앞에 놓였으나 손을 댄 기억은 거의 없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비빔밥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때가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내가 대여섯 살 때였다. 


제사 후 먹는 비빔밥은 고추장이 아니라 참기름 몇 방울을 떨어뜨린 조선간장을 넣고 비볐다. 전통적으로 제수 음식에는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는다. 고춧가루의 색과 향이 튀고 강해 정갈한 분위기의 제수 음식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다. 


비빔밥을 비비기 전에 탕국 국물 한두 숟가락도 꼭 끼얹었다. 수분을 머금은 밥알의 활기가 살아나고 부드럽게 찰진 식감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비빔밥은 제수용 나물로만 비벼 먹었고 일부러 절반은 남겼다. 한 차례의 제사가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돌솥비빔밥


비빔밥과 탕국

 탕국은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끓인 맑은 소고기뭇국과 비슷한 맛이다. 다른 점이라면 굵게 썬 양지머리와 사태고기가 많이 들어 있고 무도 나박썰기 대신 깍둑썰기한 것이다. 소고기뭇국보다 훨씬 긴 한나절 이상 푹 끓여 육수를 우려내는 것도 차이라면 차이다. 


희한하게도 차례 의식이 끝나고 비빔밥과 탕국을 먹고 나면 정신이 맑아졌다. 예를 갖춰 정성을 다해 조상의 은덕(恩德)을 기리고 후손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엄숙한 자리라는 제사 문화의 특성이 알게 모르게 심리적으로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조상의 혼을 불러들이기 위해 피운다는 향불의 기운이 제수 음식 곳곳에 스며든 것도 비빔밥의 정갈한 생명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비빔밥용 나물은 모두 볶은 것 아니면 무친 것이다. 고사리와 시금치, 콩나물, 숙주나물, 도라지, 무나물 따위인데 김 가루도 얹어 비벼 먹는다. 고추장을 넣고 비비는 평소의 비빔밥과 달리 음식의 향이 강하지 않고 은은한 맛이 나 정숙한 분위기에서 치러지는 제사 의식과 어울린다.      


비빔밥을 먹고 나면 웃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다시 큰아버지 댁으로 돌아와 또 한 번 차례를 지냈다. 큰아버지 식구와 우리 식구 모두 아홉 명이 안방에서 예를 올린 뒤 비빔밥을 또 먹었다. 명절 때는 위(胃)도 용량이 커지는지 평소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먹고도 속이 거북하지 않았다. 갈비찜과 조기구이, 동태전(凍太煎), 동그랑땡 따위의 입이 호사를 누릴 음식이 가득해서였을 것이다.      


 비빔밥은 여러 가지 나물에 양념을 섞어 비벼 먹는 밥이다. 옛날 궁중 용어로는 골동반(骨董飯)이라 불렀다. 잡다한 물건들이 한데 섞였다는 의미의 한자 골동에 비유한 명칭인데 예스러우면서 품위가 있는 말이라 새삼 조상들의 조어(造語) 솜씨에 탄복하게 된다. 비빔밥은 별도의 조리 과정 없이 비비는 행위만으로 요리가 완성되는 단순하고 편리하면서 가장 보편적인 한국 음식이다.      


육회비빔밥


#비빔밥의 유래

 비빔밥의 유래는 구전(口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세 가지 설(設)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내가 비빔밥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처럼 제사나 명절 차례를 지낸 뒤 제수 나물을 밥에 올려 비벼 먹는 풍습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농사일 중간에 먹는 식사나 새참이 비빔밥이었고 이런 농경(農耕) 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설이다. 예전에 농사짓는 농가(農家)의 남정네들이 끼니를 때우거나 새참을 먹는 장소는 논두렁길이나 들녘이었다. 식사 공간이 야외라 아낙네들은 번거롭지 않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큰 쟁반에 담아 머리에 이고 나간 음식이 바로 아이디어의 산물, 비빔밥이라는 것이다. 


비빔밥은 대접에 밥을 먹을 만큼 퍼 담고 갖가지 산나물과 고추장, 참기름을 넣어 득달같이 비벼서 잽싸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야외 맞춤형 음식이었다. 소탈한 농가의 정서와 조상들의 슬기가 담겨 있는 비빔밥은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유의 음식이라 불러 마땅하다.     


끝으로 음력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날에 잔반(殘飯)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비빔밥을 궁리해 냈다는 얘

기도 전해진다. 새 마음 새 뜻으로 새해를 맞이하고자 남은 음식을 처리할 요량으로 찬밥에 나물 반찬을 죄다 쏟아붓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은 생활상이 계승됐다는 주장이다.     


세 가지 설 모두 비빔밥의 유래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통적인 풍습이라 비빔밥이야말로 한국인의 정서가 서려 있는 으뜸 음식이 아닌가, 여겨진다.     


쌀을 섞어 지은 보리밥


#찬밥과 비빔밥

 비빔밥과 관련지어 또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찬밥과 비빔밥의 관계다. 전기밥솥이 등장하기 전, 찬밥은 어머니들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국내에 전기밥솥이 출시된 시기는 1970년대 중반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집도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 1975년 초 전기밥솥을 처음 장만했던 기억이 난다. 이전까지 가정에서 밥을 짓는 도구는 가정용 알루미늄 밥솥이었다. 따뜻한 밥의 기운을 유지할 수 있는 보온 밥솥이 없으니 어느 가정에서나 식은 밥과 찬밥이 애물단지로 굴러다닐 수밖에 없던 때였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식은 밥과 찬밥은 가정마다 즉석 비빔밥으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커다란 양푼에 남은 찬밥을 쓸어 담고 나물 반찬 몇 가지를 얹은 뒤 고추장과 참기름을 둘러 쓱쓱 비벼 온 가족이 둘러앉아 나눠 먹은 기억은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궁여지책(窮餘之策)의 산물로 탄생한 즉석 비빔밥은 희한하게도 맛이 예사롭지 않았고 입맛이 없거나 마땅한 찬거리가 없을 때 더욱 빛을 발했다. 식은 밥과 찬밥을 모자랄 것 하나 없는 훌륭한 한 끼 음식으로 탈바꿈시킨 가정식 식문화가 바로 어머니표 비빔밥인 셈이다.      


보리밥에 넣어 비벼 먹는 10가지 나물콩나물시금치버섯호박고사리가지무나물 등이다.


#비빔밥의 종류

 비빔밥은 종류도 다양하다. 밥과 나물을 돌솥에 넣고 뜨겁게 데워서 먹는 돌솥비빔밥을 비롯해 산나물이 듬뿍 들어간 산채(山菜) 비빔밥, 멍게 비빔밥, 새싹 비빔밥, 육회 비빔밥 등이 있다. 별미로 먹는 보리 비빔밥도 빼놓을 수 없다. 날치알과 채소, 잘게 썬 김치, 김 가루에 양념을 섞어 비벼 먹는 알밥도 넓은 의미의 비빔밥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알밥은 돌솥비빔밥처럼 뜨겁게 데워서 뚝배기 채로 나온다. 


흔히 절밥이라고 하는 사찰의 공양(供養) 음식으로도 비빔밥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안동지역에서 유명한 헛제삿밥 상차림에도 비빔밥이 딸려 나온다. 헛제삿밥은 제사 후 먹는 제삿밥 흉내를 낸 밥상을 말한다.     


비빔밥의 생명줄인 고추장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역시 숟가락으로 비벼야 제맛이다.


#K푸드의 힘

비빔밥을 비빌 때 드물게 숟가락 대신 젓가락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숟가락으로 밥과 나물을 비비면 밥알이 뭉개져 밥알의 개별적 특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비빔밥의 생명줄이랄 수 있는 고추장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젓가락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비빔밥은 역시 숟가락으로 비벼야 제맛이다.      


 한국인의 정체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비빔밥은 이제 K푸드의 상징으로 세계인들에게 각인된 자랑스러운 음식이다. 이번 주말에는 냉장고에 남은 반찬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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