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때부터 제사 때만 되면 먹는 국이 있다. 국이면서 탕이고 탕이면서 국인 탕(湯)국이다. 경상도 지역의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 탕국의 맛은 소고기뭇국과 비슷하다. 하지만 탕국에는 고기와 무가 더 많이 들어가고 요리 방법에서도 차이가 나 결국 다른 맛이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양지머리를 사용하나 소고기뭇국은 고기를 잘게 썰어 끓이고 탕국은 덩어리째 크게 썰어 한 시간 이상 푹 고아 낸다. 양지머리는 소의 가슴 쪽 뼈와 살을 일컫는데 국거리와 탕거리, 소고기 장조림으로 많이 쓰이는 부위다. 고기가 익으면 결대로 잘 찢어지는 특징이 있다.
무도 소고기뭇국은 나박썰기, 탕국은 깍둑썰기한다. 무의 양도 소고기뭇국보다 탕국이 더 푸짐하다. 지역에 따라 두부를 넣기도 하고 해산물을 추가하기도 하지만 우리집에서는 양지머리와 무만 넣고 끓인다.
핏물을 뺀 양지머리 덩어리와 다시마 한 장, 물을 붓고 센 불로 끓인다.
#소고기뭇국과 탕국의 차이
양념 방식도 다르다. 소고기뭇국은 참기름과 후추, 국간장, 다진 마늘, 소금으로 간을 맞추나 탕국은 오로지 소금과 국간장으로만 간을 조절한다. 향이 강하고 자극적인 양념을 사용하지 않는 제수(祭需) 음식의 예법(禮法)에 따른 것이다. 일반적인 국을 끓이듯이 요리하는 소고기뭇국이 시원하면서 고소한 감칠맛이 특징이라면 오랜 시간 끓이는 탕국은 육수의 맛이 깊고 슴슴한 맛이 지배적이다.
소고기뭇국에서는 입맛을 다시게 하는 구수한 향이 나지만 탕국에서는 눅눅한 옷 냄새처럼, 설명하기 애매한 다소 고약스러운 향이 풍긴다. 아마 잡내를 누그러뜨리는 마늘의 부재 때문이라 여겨진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탕국 특유의 냄새가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부드럽게 삶아진 소고기를 먹는 즐거움이 더 커 언제나 한 그릇을 뚝딱 비웠던 기억이 난다.
탕국 속 고깃덩어리는 오래 고아져 부드러움의 극치라 젓가락으로 쉽게 분리되는데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푹 익어 물컹물컹한 탕국의 무맛도 빼놓을 수 없다. 한 입 베어 물면 스르르 허물어지는 무에서 시원하면서 달고 짭조름한 맛이 났다. 탕국을 처음 먹었을 때의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육수가 끓을 동안 무를 손질하고 깍둑썬다.
#3대로 이어진 탕국의 맛
명절 때마다 경북 상주 큰아버지 댁에서 끓인 탕국과 어머니가 끓인 탕국의 맛은 신기하리만치 닮았다. 할머니를 모신 큰아버지 댁에서 신혼살림을 한 어머니나 큰어머니 모두 시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2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직접 제사상을 차리기 시작한 어머니도 10년 넘게 추석과 설, 아버지의 기일(忌日)에 탕국을 끓였다.
중고등학교 때는 제사음식에 길들인 탓인지 탕국 끓이는 냄새가 더할 나위 없이 정겨웠고 탕국 냄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두 세끼 내내 탕국만 먹곤 했었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집사람도 시어머니로부터 탕국 끓이는 법을 배웠다. 집사람이 제사상에 올린 탕국의 맛이 아득한 옛날 큰아버지 댁에서 먹은 탕국의 맛과 다르지 않은 점은 그런 면에서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무를 넣고 소금과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 뒤 뭉근하게 한두 시간 끓인 탕국
할머니의 탕국에서 어머니의 탕국, 다시 집사람의 탕국으로까지 3대로 이어진 변함없는 탕국을 이번 추석에도 맛있게 먹었다. 식구들 모두 국을 좋아해 우리집에서 제일 큰 냄비로 한가득 끓인 탕국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도 세끼에 걸쳐 대여섯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제사음식인 탕국은 평소에도 가끔 우리집 밥상에 오른다. 탕국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들을 위해서다. 직장 근처 오피스텔에서 독립생활을 하는 아들이 한 번씩 집에 와 탕국을 먹고 싶어 할 때가 그렇다. 바깥에서는 구경할 수 없고 오로지 집에서만 먹을 수 있는 탕국을 끓이는 방법은 지역마다, 집마다 조금씩 다르다. 우리집에서 탕국을 요리하는 방식은 이렇다.
양지머리의 진액이 남김없이 우러나 국물이 진하고 기름진 탕국
#우리집 표(標) 탕국
1. 양지머리를 찬물에 30분 이상 담가 핏물을 뺀다.
2. 핏물을 제거한 양지머리를 큰 냄비에 담고 물을 넉넉히 붓는다. 국간장 두 큰술과 다시마 한 장을 넣고 센 불로 끓인다.
3. 육수가 끓으면 중 · 약불로 낮추고 2~3분 뒤 다시마를 건져낸다.
4. 깍둑썬 무를 넣고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 뒤 약불로 뭉근하게 한두 시간 끓인다.
5. 틈틈이 육수에 뜬 거품을 걷어낸다. 국물 맛에서 날 수 있는 탁하고 텁텁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서다.
추석 차례상에 올린 탕국
한두 시간 은근하게 끓여낸 탕국은 양지머리의 진액이 남김없이 우러나 국물이 진하고 기름지다. 소금과 국간장으로만 낸 간 맛이라 뒤끝도 없다. 온 가족이 다 모이는 명절과 제사음식인 탕국에는 고향의 정서가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