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문을 열면 언제나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식재료가 있다. 어느 집이나 냉장고에는 온갖 먹거리가 가득 들어차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밥상에 빠질 수 없는 완성 식품 김치가 그렇고 양파와 대파, 청양고추 등 채소 종류도 그렇고 된장과 고추장 따위의 한국 고유의 장(醬)류와 고춧가루, 참기름, 간장, 설탕, 소금, 식초, 마늘, 후추에 이르는 양념도 마찬가지다. 육류와 생선도 냉장고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젓갈류를 포함한 다양한 밑반찬도 손길이 닿는 곳에서 5분 대기조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을 터이다.
냉장고라는 음식물 보관저장 공간을 중심으로 이 모든 일련의 먹거리들은 수시로 식탁 위에 모습을 드러낸 뒤 자기 의지와는 하등의 상관없이 위치를 바꿔가며 냉장고의 어딘가로 다시 돌아갈 것일진대 유독 하나만이 늘 정위치를 고수하는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암탉의 몸에서 나온 달걀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노른자 본래의 품위를 살린 계란프라이.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노른자를 익히지 않은 계란프라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달걀은 냉장고에서 유일하게 제자리가 정해져 있는 식재료다. 달걀은 외부의 충격에 쉽게 깨져 보관상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냉장고에 달걀만 따로 보관하는 달걀 전용 케이스가 홀로 독립된 공간에 비치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달걀은 우리가 식탁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식재료이자 손쉽게 단백질을 보충하는 간편하고 훌륭한 음식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인이 즐겨 먹는 글로벌 음식 또한 달걀 요리다.
#달걀 요리
달걀로 만드는 요리를 꼽자면 계란프라이와 계란찜, 계란말이, 계란탕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달걀 요리를 조금 더 확장한 것으로는 달걀을 풀어 버터를 두르고 으깨듯이 볶아 익힌 스크램블드에그, 달걀을 얇게 부친 뒤 잘게 썰어 볶은 고기나 채소 따위를 싸서 먹는 오믈렛, 달걀을 풀고 양파 등을 섞어 얇고 넓적하게 부친 것을 밥 위에 얹은 계란덮밥, 달걀과 밥을 함께 볶은 달걀볶음밥 등이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보편적이면서 한국인이 흔하게 먹는 달걀 요리는 계란프라이와 계란찜, 계란말이일 것이고 몇 개를 더 추가한다면 계란탕과 계란덮밥, 달걀볶음밥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빠뜨릴 뻔한 게 하나 있다. 삶은 달걀이다. 분명한 것은 삶은 달걀은 음식으로 먹는다기보다 간식이나 군것질거리라는 인식이 굳어져 요리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계란프라이 완숙(完熟)
#계란프라이의 추억
달걀 요리 중 가장 많이 자주 먹는 것은 단연 계란프라이일 것이다. 각자 한 개의 달걀을 온전히 독립적으로 먹을 수 있고 요리 방법이랄 것도 없고 요리 시간도 아주 짧기 때문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살림살이가 팍팍했던 시절, 밥상머리에 앉은 아이들에게 계란프라이는 선망의 음식이었다. 어쩌다 식구 수대로 계란프라이가 밥상 위에 하나씩 차려지는 날이면 아이들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그것을 먹어 치웠다.
중고등학교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계란프라이가 밥 위를 덮고 있으면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계란프라이를 먹을 때의 기쁨과 날달걀을 깨 먹는 즐거움은 베이비 붐 세대라면 누구나 실감할 것이다. 지금은 흔해 빠진 게 계란프라이라 없어서 못 먹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 안 먹는 시대이고 보면 계란프라이에 목메던 시절의 풍경은 딴 세상 이야기로 들릴 법도 하다.
계란찜에 들어갈 달걀 세 개.
8, 9년 전 쌍팔년도 쌍문동을 배경으로 한 가족 드라마를 기억할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학창 시절과 골목길의 옛 추억을 생동감 넘치게 되살린 공전의 히트작이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스라한 지난날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진 시청자가 많았을 것인데 그중 하나가 모자라는 계란프라이를 두고 가족 간에 펼쳐진 애틋한 식사 장면이었다.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계란찜
계란찜은 계란프라이보다 어렵고 나름의 품이 들어가 달걀 요리라 할 만하다. 날달걀 서너 개를 풀고 종이컵 기준으로 물 한 컵과 송송 썬 쪽파나 대파를 섞어 냄비 속 뚝배기나 턱이 높은 그릇에 담아 찐 음식이다. 물은 생략해도 무방하다.
산봉우리처럼 탐스럽게 부풀어 오른 풍만한 모습이 먹음직스럽고 비교할 수 없이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에 고소한 맛이 매력적이라 남녀노소 두루 다 좋아하는 음식이다. 소금 반 작은술과 참기름 한 큰술을 넣고 찌면 간간하고 고소한 풍미가 업그레이드된다. 매콤한 맛을 내기 위해 청양고추 한 개를 넣고 후추를 치기도 한다.
달걀을 잘 저어 풀고 대파를 잘게 썰어 넣어 섞는다.
센불로 시작해 끓는 소리가 나면 중 약불로 줄여 10여 분간 뭉근하게 쪄 속까지 골고루 익힌다. 탱탱한 계란찜을 위해 완성될 때까지 뚜껑을 열지 말아야 한다. 계란찜의 탄력을 확인하고 싶다면 젓가락으로 살포시 찌르면 된다. 기본적으로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라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나 김치찌개나 부대찌개처럼 맵고 얼큰하면서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때 많이 찾는다.
나는 계란찜을 요리할 때 달걀 서너 개와 쪽파 또는 대파만 넣는다. 물과 소금, 참기름, 후추는 사용하지 않는다. 계란찜의 탄력을 끌어올리고 담백한 맛을 즐기기 위해서다.
달걀물을 담은 사기 국그릇을 냄비에 얹는다.
*계란찜
1. 달걀 서너 개를 잘 저어 풀고 쪽파나 대파를 잘게 썰어 넣는다.
2. 사기 국그릇에 달걀물을 붓고 냄비에 얹는다. 냄비에 채우는 물의 양은 국그릇의 3분의 1가량이 잠길 정도다.
3. 뚜껑을 닫은 채 센불로 시작해 끓기 시작하면 중 약불로 낮춘 뒤 10여 분을 뭉근하게 찐다.
4. 젓가락으로 부풀어 오른 계란찜을 찔러 취향에 맞는 탄력이 느껴지면 불을 끈다.
탐스럽게 부풀어 올라 먹음직스러운 계란찜.
#난이도의 클래스가 최상인 계란말이
계란말이는 달걀 요리 중 난이도(難易度)의 클래스가 최상이라 할만하다. 예쁘게 모양을 내기가 쉽지 않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이 있다. 음식의 모양과 색깔, 상태가 맛 못지않게 미각에 호소한다는 뜻으로 음식은 입으로만 먹는 게 아니라 눈으로도 먹는다는 미학적 가치를 강조한 속담이다. 노란빛이 도드라지는 계란말이는 특히 더 그렇다. 계란말이를 볼품 있게 완성해 먹기 좋게 칼로 써는 데에도 요령이 수반되는 이유다.
중불로 팬을 달군 뒤 식용유를 넉넉하게 두른다.
기껏 어렵사리 요리한 계란말이 건만, 칼로 각을 잡고 자르는 과정에서 형태가 삐져 나가거나 아예 허물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 난감했다. 계란말이가 접힌 부분을 아래쪽에 두고 칼질하라는 집사람의 조언을 충실하게 따라 하더라도 결과는 썩 내키지 않았다. 계란말이를 단단하게 익히면 칼질도 무난하리라 생각했으나 올바른 선택이 아니란 것을 집사람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계란말이를 너무 익히면 오히려 칼질에 방해된다.
계란말이를 여러 번 만들어 봤으나 그럴 때마다 요리 소양의 부족함을 실감한다. 이제껏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웬만한 음식은 그럴듯하게 밥상에 올려 왔는데 계란말이만큼은 성에 안 찬다.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른 이도 만족할 리가 없을 것이다. 2인 기준 계란말이의 식재료로는 대개 달걀 네 개와 대파 한대, 당근과 햄 약간, 소금 한 작은술을 사용한다. 달걀은 더 넣어도 되고 당근과 햄은 선택사항이다. 달걀이 잘 말리도록 대파와 당근, 햄은 잘게 썰어야 한다.
약불로 낮춘 뒤 달걀물을 팬에 붓고 얇게 펼친다.
나는 계란찜과 마찬가지로 달걀과 대파만으로 계란말이를 만든다. 이유는 계란찜과 같다.
중불로 팬을 달군 뒤 식용유를 넉넉하게 두른다. 식용유가 팬 위에 고루 깔리도록 팬을 이리저리 기울인다. 식용유가 팬 전체에 두루 덮여야 달걀을 말 때 찢어지지 않는다. 예열이 끝났으면 약불로 낮춘 뒤 달걀물을 절반만 붓고 팬 전체에 퍼지도록 얇게 펼친다.
달걀이 설익기 시작하면 뒤집개와 숟가락 또는 뒤집개와 손을 이용해 팬의 앞쪽에서부터 조금씩, 조심스럽게 겹치게 말아 반대쪽 가장자리로 민다. 언젠가 솜씨가 뛰어난 노련한 요리사가 젓가락 두 개만으로 달걀을 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로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 달인의 경지라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있다.
달걀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만다.
*계란말이 말기와 칼질
말면서 틈틈이 달걀말이의 윗부분과 앞, 뒤, 옆면을 뒤집개로 살살 두드리며 겉모습이 깔끔하고 세련되게 다듬는다. 달걀이 잘 말리지 않을 때는 팬에 식용유를 조금 더 붓는다. 달걀이 너무 익은 상태에서 말거나 달걀물을 두껍게 펼쳐도 잘 말리지 않는다. 나머지 달걀물을 붓고 반대쪽 끝에서부터 같은 요령으로 말은 뒤 뒤집개와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네모나게 각을 세운다. 이론적으로 숙지하더라도 달걀을 그럴듯하게 마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스스로 감각을 터득하는 게 가장 좋은 스승이다.
뒤집개와 숟가락을 이용해 달걀말이를 네모나게 다듬는다.
완성된 계란말이를 도마 위에 올리고 열기를 약간 식힌 다음 적당한 두께를 가늠해 칼로 자른다. 계란말이를 뜨거운 상태 그대로 자르면 자칫 형태가 어그러질 수 있다. 자를 때 계란말이의 접힌 부분이 아래쪽을 향하도록 한다. 접힌 부분이 위를 향하면 칼에 닿을 때 모양이 망가질 수 있다.
*계란말이
1. 볼이나 턱이 높은 그릇에 달걀 네 개를 풀고 송송 썬 대파를 넣고 잘 섞는다.
2. 중불로 팬을 달군 뒤 식용유를 넉넉하게 두르고 이리저리 팬을 기울인다.
3. 약불로 불의 세기를 조절한 뒤 달걀물을 절반만 붓고 팬 전체에 얇게 펼친다. 달걀물이 두껍게 깔리면 말 때 애를 먹는다.
4. 달걀이 설익기 시작하면 뒤집개와 숟가락을 이용해 앞에서부터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는 과정을 반복해 반대쪽 끝으로 민다.
큼지막하게 잘라 접시에 올린 계란말이.
5. 달걀을 마는 중간중간에 달걀말이의 위와 앞, 뒤, 옆 부분을 뒤집개로 눌러 모양을 예쁘게 다듬는다.